아침부터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방법
크고 작은 병들
버리고 비우는 것만으로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는 없겠지요. 버리고 비운 다음에는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 했습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쉽게 사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때마침 가성비라는 단어가 트렌드였던 시기여서 트렌드에 민감하고 세련된 현대인이자 귀가 몹시 얇은 저는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여기저기 비교해보고 가성비가 뛰어난 제품을 찾으려 부단히도 애썼습니다. 이전에는 보통 가격도 가격이지만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나 좋은 품질 혹은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 따위의 것들을 주로 고려하곤 했지요. 하지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 했고,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아도 가격이 저렴한 물건을 사고는 했습니다. 그리고는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며 정신승리를 거두곤 했죠.
Jordan이라는 칫솔이 있습니다. 사실 Jordan을 조던이나 조단이라고 읽는 것이 맞는지 요르단이라고 읽는 것이 맞는지도 잘 모릅니다. 어쨌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오래 그 칫솔을 사용했습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써보고는 계속 썼지요. 칫솔을 새로 사러 마트에 가서는 자연스럽게 그 칫솔을 사려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심지어 개수도 많은 다른 칫솔을 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안의 합리성이 하필 그때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은 곧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이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가격도 저렴하고 수량도 많은 칫솔을 사야 하는 것이었죠. 크게 고민하지 않고 저렴한 칫솔을 샀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에 저는 가성비병에 걸렸던 것이죠. 크고 작은 병을 달고 사네요. 장수하려나 봅니다.
매일 아침마다 기분이 나빴습니다. 원래 쓰던 칫솔은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칫솔모도 굉장히 부드러워서 양치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거든요. 새로 산 칫솔은 저렴한 가격에 수량도 더 많이 줬지만 괴상한 고무로 된 돌기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칫솔질을 할 때마다 느낌이 별로였습니다. 심지어 생긴 것도 칫솔이라기보다는 괴생명체에 가까운 모양이라 어쩐지 볼 때마다 입에 넣기도 싫고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매일 아침, 매일 밤마다 기분이 나빴습니다. 하지만 선택은 제가 한 것이었고 선택에 대한 책임도 제가 져야만 했죠. 꾹 참고 버텼습니다. 마침내 칫솔을 모두 소진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좋아하는 칫솔을 다시 쓸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마트에 가는 내내 설렐 정도였으니까요.
20 SDK/year VS 4 SDK/month
칫솔을 먼저 예로 들었지만, 당시 여러모로 환자에 가까웠던 저는 크고 작은 실수를 많이도 저질렀습니다. 멀쩡한 신발을 여러 켤레 버리고는 신발이 부족해서 새로 사기도 했죠. 당시에는 직장에 다니던 때라, 운동화를 신을 일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물건을 버리던 시기에 멀쩡한 운동화를 거의 다 버렸죠. 옛사랑과 함께 쇼핑하며 샀던 거의 새것과 다름없던 운동화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핑계로 버렸습니다. 선물 받은 좋은 운동화도 같은 핑계로 버렸죠. 아깝고 귀해서 한 번도 신어보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버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인데도 억지 핑계를 만들어 버리기를 반복했습니다. 한동안은 그래서 주말에도 늘 구두만 신고 다니고는 했어요. 저는 아주 대단한 댄디가이였던 것이죠.
사람이 구두만 신고 살 수 있나요. 결국 운동화를 새로 사야 했습니다. 맨발로 다니는 벌을 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저는 발이 조금 큰 편이라 맞는 신발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길이가 맞아도 볼이 안 맞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보통은 이태원에서 꼭 신어보고 사고는 했어요. 하지만 때마침 가성비병에 걸린 저는 인터넷으로 합리적인 신발을 사기로 했습니다. 보통은 뉴*** 운동화를 많이 신었어요. 사실 좋아서 신었다기보다는 맞는 게 거기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사이즈도 적당하고 심지어 가격도 훨씬 저렴한 데다 국산 브랜드에서 나온 신발을 발견한 겁니다. P사의 운동화였는데, 뼛속까지 애국청년인 저는, 한국 브랜드에서 내 발에 맞는 신발이 나오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기꺼이 주문을 클릭했습니다.
신발, 운동화라는 게 그렇게나 쉽게 망가질 수 있는 건지 그동안 몰랐습니다. 몇 번 신지도 않았는데, 아직 도보여행도 한 번 안 갔는데 신발이 점점 납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납작해진다는 게 좋은 설명인지 모르겠네요. 정면에서 봤을 때 처음에 정사각형이었던 신발이 시간이 지날수록 옆으로 넓은 직사각형으로 변했다고 하면 될까요. 어쨌든 가성비병에 국뽕까지 맞고 새로 산 신발은 한 달 정도 저와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뉴***에 가서 신어보고 발에 잘 맞는 신발을 새로 샀습니다. 흔한 일이죠. 돈을 두 번 세 번 쓰게 만드는 합리적인 소비. 어쨌든 오늘의 교훈은 첫째, 싼 게 비지떡이다 그리고 둘째, 신발은 신어보고 사라 그리고 셋째, 버리고 비운다고 아무 거나 다 버리고 비우면 안 된다입니다. 잘 버리는 방법에 대한 얘기는 조만간 한 번 더 자세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