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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일영 Jan 18. 2021

04_나의 미니멀라이프 실패기 #03

남의 경험과 나의 경험

혹독한 실패를 통해 가성비병에서 벗어난 저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신중한 소비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제는 가격을 기준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건을 사기로 했지요. 그래서 어떤 물건이든 사기 전에 항상 인터넷으로 후기와 리뷰를 치열하게 찾아봤습니다. 텀블러 하나를 살 때도 인터넷으로 후기를 검색하고 좋은 리뷰와 그렇지 않은 리뷰를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중하게 비교해가며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물건을 고르기 위해 밤새워 리뷰를 찾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다나와, 인벤, 뽐뿌, 클리앙 등에서 관련 정보를 밤새 탐독하고는 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참 즐거웠던 시절이네요.



차를 바꿔야 할 이유

Stanley 텀블러를 하나 샀습니다. 손에 들고 다니기 좋은 작은 사이즈로 뚜껑을 열지 않아도 안에 담긴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아주 편리하고 견고하고 보기에도 좋은 제품이었죠. 무엇보다, 후기가 아주 좋았어요. 요새는 쓰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은 제품이었고 외국에서 써봤는데 아주 좋더라는 후기가 많았습니다. 어쩐지 남들은 잘 모르는 좋은 걸 혼자만 알고 있는 기분으로 만족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써보고는 마음에 들어서 가방에 넣고 다닐 더 큰 사이즈의 제품을 하나 더 사기도 했습니다. 큰 텀블러에 따듯한 차를 가득 담아 가방에 넣어두고, 작은 텀블러에 덜어서 들고 다니며 마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일단은 텀블러 디자인이 좋아서 멋져 보이기도 했고요. 텀블러를 쓴다면 누군가 친환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주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제품보다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두 텀블러 모두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하나, 차에 있는 음료수 홀더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요. 그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문제였습니다. 운전 중에 목이 마르면 음료를 마셔야 하고, 그러려면 손이 닿기 좋은 곳에 텀블러가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큰 텀블러는 그러려니 해도 작은 텀블러가 음료수 홀더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혼자 운전을 할 때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수석에 두고 쓸 수 있지만, 누가 옆에 타기라도 하면 텀블러를 둘 곳이 없는 겁니다. 물론, 저는 외로운 승냥이라 대부분 혼자 차를 타지만 가끔 누가 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가랑이 사이에 끼워 넣자니 모양이 빠지고, 엉덩이 뒤에 넣자니 불편하고, 운전하는 내내 손에 들고 있을 수도 없고, 그 마음에 들던 텀블러가 점점 애물단지가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음료수 홀더가 큰 차로 바꾸기로요.


처음에 샀던 작은 텀블러는 지금 재떨이로 쓰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샀던 큰 텀블러는 지금 저금통으로 쓰고 있고요. 작은 텀블러는 뚜껑 부분이 고장 나서 아예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큰 텀블러는 내용물이 자꾸 새어서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다 찾아보니 지금은 공식 홈페이지도 생기고 뚜껑도 따로 팔고 있네요. 두 텀블러가 고장 났던 시기에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쨌든 지금 저는 두 개의 다른 텀블러를 쓰고 있습니다. 예전에 일하던 직장에서 사무실 대청소 중에 발견한 주인도 브랜드도 알 수 없는 텀블러를 가져다 쓰고 있고요. 재작년 하나를 더 선물 받아 두 개가 되었습니다. 두 텀블러 모두 음료수 홀더에 잘 들어가는 건 물론이고 보온보냉 효과도 더 좋더군요. 주인을 알 수 없던 텀블러는 벌써 3년 넘게 쓰고 있네요. 아주 흡족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차는 안 바꿨고요.



무릎을 바꿔야 할 이유

누구나 원래 사회생활을 하려면 서류가방 하나 정도는 들고 다녀야 하잖아요. 원래 들고 다니던 가방은 선물 받은 명품 가방이었는데요. 저는 누가 봐도 명품 존재감 뿜뿜인 그 가방이 좀 부담스러웠어요. 일단 명품과 저는 잘 어울리지 않고요. 굉장히 세련되고 멋진 가방이었는데 저는 세련되지도 멋지지도 않은 흔한 패찐이니까요. 결정적으로는 미니멀리스트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아무래도 어색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가방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를 다니며 저 같은 흔남이 편하게 들고 다니기 좋은 가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백팩을 많이 추천하더라고요. 하지만 누구나 원래 사회생활을 하려면 서류가방 하나 정도는 들고 다녀야 하니까 브리프케이스를 찾아봤습니다. 처음엔 저렴한 노트북 가방 정도를 살 계획이었습니다. 한 일이만 원 정도, 흔하고 눈에 안 띄는 얌전한 가방으로요. 


300달러 조금 넘는 가격을 주고 Filson 가방을 샀습니다. 아마존이었는지 이베이였는지 ASOS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외국 사이트에서 샀고요. 일이만 원짜리 노트북 가방을 찾으러 들어갔다 약 30배쯤 하는 필슨이라니. 뭐 핑계는 많았습니다. 견고하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고, 화면 속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굉장히 멋졌거든요. 재질이 패브릭이라 가죽이나 플라스틱 소재보다는 친환경적이고 빈티지한 느낌도 나고요. 무엇보다, 후기가 정말 좋았어요. 쓰면 쓸수록 멋있어진다, 막 다뤄도 고장이 없다, 유행을 타지 않는다, 요즘 유행이다, 톰 크루즈도 쓴다, 남자는 필슨이다, 방수다 등등. 튼튼하고 터프한데 멋지기까지 하며 출근할 때도 여행 갈 때도 잘 어울리고 좋다는 말에 냉철한 감성과 트렌디한 이성의 합리적인 미니멀리스트인 저로서도 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반떼를 사러 갔다 그랜저를 사 온다고 하죠. 인터넷 후기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요전 운동화의 참혹한 실패로 싼 것 열 개보다 좋은 것 하나가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꽤나 비싼 가격이었지만 십 년을 쓴다고 생각하면 일 년에 30달러, 한 달에 2.5달러라면 땡큐라고 또다시 정신승리를 시전했죠. 그런데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봤는데도 제가 무시한 건지 이 가방도 단점이 있더군요. 무겁습니다. 아주, 굉장히요. 차를 타고 출퇴근할 때야 상관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가방을 들고 돌아다닐 일이 있을 때는 아주 고역입니다. 가방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가방만 들고 다녀도 무겁습니다. 심지어 손으로 들거나 한쪽 어깨에 걸쳐야 하는 디자인이라 척추에 무리가 옵니다. 노트북은커녕 볼펜 한 자루만 넣어도 골반이 비틀어지는 고통이 느껴집니다. 볼펜 두 자루를 넣으면 무릎 연골이 삐걱댑니다.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무겁습니다. 



덮어놓고 믿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예 목적을 상실한 텀블러보다는 다행히도 필슨 가방은 여전히 가방으로 쓰고 있습니다. 여전히 튼튼하고 멋진 건 변함없지만 상특 근력이 없는 저 같은 중년찐은 늘 몸을 아껴야 하니까 조심조심 들고 다닙니다. 가방에 담을 물건이 아주 적고, 가방을 드는 총시간이 3분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제한된 조건에서만 쓰지만요. 어떤 분들에게는 스탠리와 필슨이 인생 텀블러, 인생 가방일 수도 있을 거예요. 제게는 아니었지만요. 경험은 다 다른 것이죠. 남의 경험과 나의 경험은 굉장히 다른 것이고요. 사실 텀블러도 필슨도 물건은 죄가 없더라고요. 다들 다른 이들에게는 좋은 물건일 테니까요. 저랑 조금 안 맞았을 뿐이죠.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서로 안 맞는, 그런 경우는 많잖아요. 겪어봐야 아는 거죠. 어쨌든 오늘의 교훈은 인터넷 후기 믿지 마라 혹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정도가 되겠네요.


*이렇게 써놓고 나니 제가 걸렸던 병이 한 가지 더 생각나네요. 다음엔 아웃도어병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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