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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일영 Jan 19. 2021

05_나의 미니멀라이프 실패기 #04

아웃도어병의 서막

미니멀리즘 관련 책을 보다 보면 이런 얘기가 있죠. 짐은 이사할 때 차 한 대에 들어갈 만큼만 적당히 소유하라, 이동이 편리한 가구를 골라라 뭐 그런 것들이요. 저는 그런 내용이 아주 감명 깊었어요. 혼자 오래 살다 보니 여기저기 원룸을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었거든요. 안타깝게도 행동하는 네티즌, 실천하는 게이머인 저는 좋은 걸 배우면 곧바로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요.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이동하기 편하면서 집에서도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고 언제든 내 차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물건은 뭐가 있을까 하고요.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또 원룸을 옮길 테니까요. 핑계는 충분했죠. 미니멀리즘 책들을 보면서 선구자 같았던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꼼꼼히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늘 그렇듯이, 저도 답을 찾았습니다.


또 다른 시작, K-START

치열한 고민의 결론은 온갖 가사용품을 캠핑용품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캠핑용품은 정말 장점이 많습니다. 일단, 대부분 접이식이라 옮기기가 쉽고요. 필요할 때만 펼쳐서 사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접어 두면 되니 공간도 절약할 수 있죠. 또 야외에서 사용하는 것들이니 기본적으로 대부분 튼튼하고, 가볍고, 차에 넣거나 정리하기도 편하죠. 작은 원룸을 캠핑장처럼 꾸미는 상상을 했습니다. 얼마나 멋지고 예쁠까요. 다음번에 이사를 할 때에는 또 얼마나 간편하고 기분이 좋을까요. 캠핑용품이 다가 아니죠. 요즘 캠핑 의류는 또 얼마나 디자인이 좋은가요. 주말이면 멋진 옷을 입고 자유롭게 캠핑을 다니는 상상도 했습니다. 집에서 쓰던 물건을 그대로 접어 차에 싣기만 하면 될 테니 캠핑용품을 따로 살 필요도 없겠죠. 얼마나 경제적이고 또 멋진 일인가요. 캠핑용품으로 생활을 바꾸는 것이 마치 미니멀라이프의 완성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다른 질환, 아웃도어병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가 생각나네요.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 멋진 생각을 해낸 제가 기특했어요. 집에서 캠핑용품을 쓰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덧, 파타고니아 고원 한 자락에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제가 떠올랐습니다. 스테인리스로 된 머그에 담긴 따듯한 아메리카노에 위스키를 살짝 섞어 마시며 대자연과 호연지기를 느끼는 거죠. 그리고 문득 발소리에 돌아보면 길을 잃은 벽안의 미인이 있고, 함께 따듯한 아메리카노와 위스키를 홀짝이며, 당신은 참 따듯한 사람이군요,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목적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오늘은 떠나기엔 늦었어요, 이대로 함께 있어 줘요 따위의 대화를 나누다 사랑에 빠지고, 아들 하나 딸 둘을 낳고, 아들은 축구선수로 딸들은 치과의사와 판사로 키우고, 손자의 이름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저를 상상하고는 했죠. 다들 어린 시절 씽크빅으로 이 정도 상상력은 키우잖아요. K-창의력.


캠핑용품의 매력에 빠진 저는 가사용품을 대체할 캠핑용품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살던 원룸에는 가스레인지가 없었어요. 어차피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일이 없으니 전자레인지 하나면 충분했거든요. 그래서 제일 먼저 캠핑용 버너와 코펠, 커틀러리 세트를 샀습니다. 퇴근 후, 늦은 밤 혼자 장판 바닥에 앉아 티타늄 포크로 라면을 떠먹고 스테인리스 머그에 소주를 마시면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곧 벽안의 미녀를 만날 테니까요.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말이죠, 뭔가 잘못됐다는 걸. 다음으로는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를 샀습니다. 원래 잘 쓰고 있던 책상과 의자가 있었지만, 다음에 이사할 때 버리겠다고 생각했죠. 테이블과 의자를 사 두었다가, 일단은 캠핑을 다니며 쓰고, 원래 쓰던 책상과 의자를 버리면 완전히 대체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접이식 의자는 두 개를 샀어요. 언제 어디서 벽안의 미녀를 만날지 모르니까요. 미리미리 철저히 준비해야죠.


포스트 아포칼립스 미니멀라이프

캠핑용품은 장점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캠핑용품의 종류는 더 많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준비된 곳으로 글램핑을 갈 때도 필요한 것들이 또 있잖아요. 캠핑용품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했습니다. 무엇보다 캠핑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호신용품이 반드시 필요하겠더라고요. 꼭 캠핑이 아니더라도 다들 집에 야구 배트나 목검 하나 정도는 있잖아요. 또 생존용품은 캠핑장이 아니더라도 쓸 곳이 아주 많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에 빠질지 모르니까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거나, 소련군이 쳐들어오거나, 지진이 나거나, 토네이도가 오거나, 쓰나미가 밀려들지 모르는 인생인데 생존용품은 당연히 필수인 것이죠. 고맙게도 캠핑용품 브랜드들은 그런 상황에 대비해 좋은 물건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작고 쓸모 있고 실용적인 멀티툴부터 호신은 물론 육류 해체에도 좋은 헌팅나이프, 튼튼한 파라코드, 잘 튀는 파이어스틸, 저체온증을 막아주는 생존 담요 등 생활에 필수적인 용품들 말이죠. 어차피 언젠가 캠핑을 갈 테니 당연히 갖고 있어야죠. 또 혹시 모르니 2인분으로요. K-준비의식.


작고 쓸모 있고 실용적인 물건들은 보관도 쉽습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가방에 넣고 다녀도 전혀 부담 없으니까요. 작은 멀티툴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면, 갑자기 나타난 강도에게 나이프를 꺼내 대항할 수 있고, 십자드라이버로 갑자기 망가진 벽안 미녀의 닌텐도 스위치를 고쳐줄 수도 있고, 갑자기 튀어나온 부장님의 흰머리를 니들노즈 플라이어로 정리해 줄 수도 있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고 신사답게요.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준비가 되어있는 맥가이버가 된 기분이겠죠. 만약 주머니가 없거나 너무 꽉 끼는 바지를 입었다면 혹은 조막만 한 가방을 들고 다닌 다면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바지에 주머니를 많이 만들면 되겠죠. 바로 택티컬웨어입니다. 실용적이고 튼튼하고 견고한 의류들이죠. 무릎이나 팔꿈치에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지퍼가 달려있어 옷 하나로 4계절을 입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경제적이고 미니멀리즘적인가요.


간소한 살림살이와 간편한 이동을 위한 저의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습니다. 멀쩡한 침대를 두고 침낭 생활을 시작했지요. 크고 더러운 몸뚱이를 가여운 침낭에 구겨 넣고 매일 기쁜 마음으로 잠들곤 했습니다. 침대는 분해해서 한쪽으로 밀어두었고요. 침대보다 방바닥이 더 따듯해서 그건 좋더군요. 평생 등산 한 번 안 가봤지만, 앞으로는 캠핑맨으로 살기로 했으니 계절별로 필요한 등산복도 미리 사뒀습니다. 계절에 앞서서 할인 폭이 클 때 미리 옷을 사면 경제적이잖아요. 등산화는 아무래도 디자인이 미니멀하지 않아서 보기 좋은 부츠도 하나 샀고요. 그리고 수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캠핑도 등산도 가지 않는다는 걸요. 그렇지 않아도 천성이 게으르고 나태한데, 주말에 캠핑이라니요. 헛된 꿈이죠. 캠핑은커녕 동네 뒷산 한 번 올라가 본 적 없었던 저는 그제서야 앞으로도 동네 언덕길 한 번 안 올라갈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K-DREAM.


포스트 포스트 아포칼립스 미니멀라이프

처음엔 그저 이동과 사용에 불편함이 없는 간소한 살림살이를 바랐던 것뿐인데, 힘든 이사를 조금이라도 간편하게 만들기를 바랐던 것뿐인데, 어느덧 저는 지프차를 타고 사하라 사막에서 알프스산맥까지 질주하는 상남자이자 따듯한 모닥불을 피우고 스테인리스 머그를 들고 잘생긴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쾌남을 꿈꾸는 찐이 되어있었습니다. 주말이면 홀로 등산복을 차려입고 장판 바닥에 앉아 티타늄 포크로 라면을 퍼먹으며 캠핑을 갈 수 없는 현실을 한탄했죠. 스마트폰으로 남성캠핑패션, 캠핑장에서 남자가 멋있어 보일 때, 캠핑장에서 썸탄 썰 같은 걸 검색하면서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가엾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러네요. 어쨌든 당시 캠핑맨의 푸른 꿈을 품고 살던 작고 귀여운 30대의 아조씨는 아직도 캠핑을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는 거죠.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아직 몰랐거든요. 저는 더욱더 다채롭고 기기묘묘한 허튼짓을 저질렀습니다.


*아웃도어병에 대해서 쓸 얘기가 이렇게나 많을지 몰랐네요. 생각보다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2부 혹은 3부로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아웃도어병 심화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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