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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주 Jun 23. 2018

축소 사회의 상상

4월 초 ‘워크체인저(Work Changer)’라는 타이틀의 컨퍼런스에 스피커로 나섰다. 내 발언의 마무리는 이랬다. “과거에 100명어치의 노동을 동원해야 생산할 수 있었던 재화를 이제 그보다 훨씬 적은 인원의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숫자는 앞으로도 줄어들 것이라고들 합니다. 재화를 생산하는 데 인간이 점점 필요 없어진다면, 이제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의미’가 아닐까요. 의미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발견해주고 인정해줄 때만 유효한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청중 한 명이 물었다. 재화를 생산하는 데 사람이 점점 적게 필요하다면,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든다고 해서 문제일 것은 없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출생한 아이는 약 36만명, 처음으로 30만명대로 진입했다. 2016년 41만명보다 11.9% 줄어든 숫자로 감소폭도 2001년 이후 16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처음으로 합계 출산율이 1.10명 미만으로 내려갔던 2005년 정부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발족했다. 그후로 12년간 수많은 예산과 정책이 쏟아졌지만, 출산율의 하락 추세는 전혀 반전되지 않았다.

나는 작년 말부터 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 민간위원으로 합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아니 왜 나 같은 사람을?”이라는 생각에 의아했다. 정책이 기본값으로 상정하는 ‘아이를 낳은 여성’ 또는 ‘아이를 낳을 여성’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데다가, 관련한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몇 번을 고사하다가 그럼에도 결국 자리를 수락하게 된 것은 정책의 패러다임을 이제 바꾸어야 한다는 취지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혼인 부모 +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프레임, 가부장제와 산업화 시대의 생산주의 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미래를 상상하는 목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 아이를 낳지 않는지”를 직접 발언할 사람이 그 테이블에 한 명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납득이 들었다.


그 후로 반년이 좀 넘게 지난 지금, 우리에게 “그래서 어떤 미래를?”에 답할 준비가 없다는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이제까지의 저출산 대책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대대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부분이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으로 논의가 내려가면 여전히 과거의 프레임으로 많은 이야기가 빨려 들어가고 만다. 저출산과 고령사회를 ‘방지’해야 할(혹은 방지할 수 있는) 추세로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전제한 채, 아이를 낳기 어렵거나 낳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세세한 혜택을 논의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이다.(물론 전반적인 복지의 수준을 높이는 이 모든 정책들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80년대 이후 출생한 여성 인구의 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모수다. 합계 출산율을 현재의 1명가량에서 아무리 늘린다고 해도 단기간 내에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저출산 추세를 성공적으로 반전시켰다는 프랑스도 합계출산율을 0.25명가량 올리는 데 20년쯤 걸렸다. 더구나 지난 12년간 이미 잔뜩 줄어든 출생아 수를 바꿀 방법은 이미 어디에도 없다. 대대적인 이민 인구 유입을 가정하지 않는 한, 인구 축소의 사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미래다.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중요한 것은 정해진 인구 축소의 미래를 잘 대비하기 위한 정책이다. 인구가 축소되더라도, 그 사회 안에서 개인들이 누리는 행복이 축소되라는 법은 없고, 행복의 축소를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동, 새로운 돌봄,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오히려, 축소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저출산의 추세도 반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4월 초의 그 컨퍼런스에서 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도 저출산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구가 지금보다 적은 것이 꼭 나쁘다고 볼 수도 없겠죠. 다만 인구의 하락 추세가 너무 빨라서 사회가 그런 급격한 변화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나의 발표 세션이 마무리 된 후, 중년 남성 한 분이 결연한 얼굴로 다가와 명함을 내밀면서 걱정을 토로했다. “인구가 줄어들면 나라가 없어질 수도 있는데요. 인구가 줄어드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안 된다니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답을 돌려드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라는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이 분에겐 멀고 먼 미래, 나라의 존립이 그토록 걱정스러운 일이 되었을까. 나라가 없어질까 걱정되어 아이를 낳을 사람은 없다.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태어난 아이가 살아갈 미래를 행복하게 상상할 수 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을 것이다. (끝)


*이 글은 2018년 6월 <한겨레21>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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