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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17. 2024

시드니 독서 일기 - 야금야금 사는 사람

엄마는 많은 단어를 동원해 나를 부른다. 평소에는 ‘공주’, 혹은 한꺼번에 묶어 ‘우리 공주들’이라고 부른다. 딱히 공주 대접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애틋하게 부르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은 공주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딸을 공주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무뚝뚝한 애정표현으로도 유명한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왜 공주라는 별명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가 경상도를 떠난 지도 30년이 넘었고 가족들이랑 전화하는 정도를 빼면 경상도 사투리도 쓰지 않지만 흔적들은 어느 순간 튀어나온다. 생일날이면 밥상에 올라오는 찰밥에서, 새해 떡국에 숨어 있는 두부에서. 다 지워진 듯 하지만 한 사람의 역사가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엄마는 나를 선비라고 부른다. 

"시대를 잘못 타고났어.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선비로 살았어야 됐는데."

엄마의 혼잣말은 왜 이렇게 잘 들릴까. 엄마는 굼벵이라는 단어도 자주 쓴다. 내 행동이 원체 느린 데다 성격이 느긋하기도 해서 그렇다. 횡단보도 초록불이 깜빡이면 뛰기보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가만히 있기보다는 무엇이라도 해야 속이 편한 엄마에게 나는 보고만 있어도 답답한 사람. 엄마는 하루를 꼬박 진통 속에서 버티다 제왕절개로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엄마 뱃속을 나가는 데도 하루는 필요한 사람.

"쟤는 집에 불이 나도 걸어 나올 거야."

30년 넘게 충청도에 살면 누구라도 저런 말을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는 걸까….



엎드린 채로 오른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고 왼손으로 만화책을 넘겨 읽고 있으면 엄마는 나를 ‘야금야금 선수’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그 말 역시 칭찬이 아니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엎드려 먹으면 얹히지도 않냐고, 끝말을 올려 말하긴 하지만 대답을 기대하는 말 역시 아니다. 야금야금은 엄마가 나를 설명할 때 자주 가져오는 단어다. 

"안 먹는 것 같은데 야금야금 많이 먹는다." 

"집에만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야금야금 돌아다닌다."

"돈 없어 보이더만 저거 봐라, 야금야금 다 썼지…" 

엄마의 관찰력과 단어 사용 능력은 감탄할 만하다. 어쩜 저렇게 알맞은 단어들만 가져다 쓸까?




야금야금은 줄곧 내게 부정적인 단어였다. 나는 속 시원하게 해결해 내는 법이 없고 주장하는 바를 소신껏 밀어붙이지도 못하며 언제나 아주 조금씩 두 손으로 겨우 쥘 정도의 것들을 그러모으는 식으로 일상을 날 뿐이었다. 굼벵이는 아무리 빨라져도 빠른 굼벵이일 뿐이니까. 불러낼 친구가 몇 없고 모은 돈은 더더욱 없으며 여전히 편식쟁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어떤 부분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동안 바뀌었다. 야금야금, 좋은 쪽으로. 얼마 전에는 15킬로를 달렸다. (굼벵이도 뛸 수 있다!) 매주 두어 번씩 달리기 연습을 한 덕이었다. 달리기를 몇 년 했다면서, 아직도 그렇게 느리고 그렇게 허약해요? 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달리 대꾸할 말도 없고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 굼벵이 선비는 이 속도도 어지럽다. 야금야금 읽는 책의 권수는 매년 두 자릿수를 훌쩍 넘고, 4년 만에 이사를 하려고 보니 한 집에 사는 동안 야금야금 쓰며 모은 노트가 서른 권이 넘는다. 손 안에서 빠져나간 줄 알았던 시간은 야금야금 쌓이고 있었다. 로또만큼의 파급력은 없지만 반가운 소식이었다.



시드니에 사는 나는 꿈속에서도 영어를 못해 답답해하다 눈을 뜬다. 서머타임 시작으로 실감하는 여름의 시드니와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의 시드니에 익숙해지고는 있지만 시드니 문화에 섞여 있진 않다. 대륙만큼 거대한 섬의 지도를 펼쳐서 연필로 점으로 찍은 만큼의 공간도 못 차지하며 살고 있지만, 눈으로 찾기 어려운 점이라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오늘도 살며 읽고 쓴다. 아마도 이건 짐작할 수 없는 생의 끝에 이르는 동안 변하지 않을 나의 습관들. 사는 동안 깊고 더 좋아지기만 할 나의 확실한 부분들. 이 이야기는 굼벵이 선비 공주가 쓰는, 추측과 상상으로 가득한, 시드니에서 야금야금 쓰는 독서 일기.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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