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크의 알렉산드로스 <밀로의 비너스>
나는 n년차 ‘유지어터’이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때는 스물다섯 살. 59킬로그램에 가까운 몸무게를 찍은 후였다. 자취를 시작하며 불규칙한 식사에 익숙해진 탓에 불과 일 년 만에 5킬로그램이 늘었다. 체중계에 뜬 숫자를 믿을 수 없었다. 어쩐지 갑자기 허리도 아프고 발목도 아파오더라니, 이게 다 내 살이 나를 짓눌러서였다니! 앞자리가 바뀌기 전에 얼른 살을 빼야 한다는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평생 칼로리 계산도 안 하고 살던 나의 첫 다이어트가 시작됐다.
혹독하고 무자비한 다섯 달을 보내고 나니 몸무게는 어느덧 46킬로그램까지 내려가 있었다. 처음부터 이만큼이나 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이어트 삼 개월 차에 앞자리가 ‘4’로 바뀌자 조금만 더 빼보자는 욕심이 났다. 그때 나의 워너비 롤모델은 배우 김고은이었다. 이목구비와 몸매의 자기주장이 강한 다른 연예인도 많지만, 내 눈에는 수수하고 호리호리한 김고은이 제일 예뻐 보였다. 한 46킬로그램 정도면 그렇게 여리여리한 분위기를 풍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냉정한 현실은, 내가 46킬로그램까지 빼도 김고은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나와 다른 몸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작고, 다리도 길고, 뼈대도 얇았다. 그러니 마치 성형을 해서 누군가의 얼굴이 될 수 없듯, 살을 빼고 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녀와 똑 닮은 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 46킬로그램에 도달했을 때 내 몸은 내 몸대로 예뻤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몸무게의 나는 맥아리도 없고 건강하지도 않았다. 근육량을 고려하지 않고 살만 빼니, 언젠가부터 몸무게는 내려가는데 체지방률은 오르는 이상한 현상도 발생했다.
시행착오 이후, 특정 이상향을 향해 무작정 살을 빼는 것이 아닌 나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춘 관리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면서 내게 필요한 운동들을 병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잘못된 습관들을 교정하고, 건강한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었기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관리와 절제에 익숙해진 지금이 더 좋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관리’를 열심히 하는 것인지, ‘강박’에 갇혀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체중계에 뜨는 ‘50’이란 숫자를 무척이나 두려워하게 되었다. 50킬로그램에 가까워지면 바지가 점점 끼기 시작하는데, 그 느낌이 싫어서 내 몸이 ‘안전구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계속 예의주시한다. 평생을 그보다 무거운 몸으로 살아왔으면서 말이다. 이것은 관리일까 아니면 강박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마음속에 김고은이라는 이상은 지웠을지(혹은 포기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예쁜 몸’에 대한 나만의 기준과 갈망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어도 최대한 가까이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러한 미적 기준이 아예 없을 수 있다거나 없는 게 마냥 좋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지만 이것이 내 삶에 얼마큼 건강한 동력이 되고, 얼마큼 나를 옥죄는 강박이 되고 있는지, 그 경계의 문제는 나조차 잘 판가름되지 않는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지금은 ‘여신’이라 불리는 최고의 셀럽들이 그 이상을 대변한다면, 유럽 역사에서는 ‘진짜 여신’이 오랫동안 그 역할을 도맡았다. 바로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였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사멸하지 않고 살아남은 비너스의 이미지는, 시대마다 뭇 남성들이 사모하고 여성들이 동경하는 미의 기준으로 기능했다.
「밀로의 비너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너스상이다. 어정쩡한 포즈에 팔을 잃은 이 여신을 미디어에서라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품은 1820년 에게해 부근 밀로스(Milos)섬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그리스 영토인 밀로스섬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그곳에서 근무 중이던 프랑스 해군 장교 쥘 뒤몽 드위빌(Jules Dumont d’Urville)은 새 조각상의 발굴 소식을 접하자마자 프랑스 대사를 설득해 작품을 구입하게 했다. 프랑스 손에 넘어온 여신상은 1821년 루이 18세에게 헌정되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머물고 있다.
루브르가 이 비너스에 공을 들인 이유는, 작품의 연대를 그리스 문화의 융성기인 고전기(B.C. 510~323)로 추측했기 때문이었다. 기대와 달리 작품은 헬레니즘시대(B.C. 323~30)인 기원전 100년경, 안티오크의 알렉산드로스라는 인물에 의해 조각된 것으로 밝혀졌다. 비록 고전기 작품은 아니었지만, ‘진짜’ 고대 그리스의 유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루브르의 총애를 받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가 흠모하는 비너스였다! 바다의 여신 살라키아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비너스만큼 대중의 이목을 끌 만한 화두는 없기에 작품은 빠르게 비너스상으로 결론 내려졌다.
비너스로 불리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여신상은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했다. 수려한 외모, 탄탄하고 볼륨 있는 몸매, 상‧하체의 완벽한 황금비율까지, 그녀는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작품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여성상에 제대로 부합했다.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실어 허리와 골반을 약간 비튼 자세(콘트라포스토) 덕분에 S 라인의 곡선미까지 뽐낸다. 곧 흘러내릴 듯한 하의는 작품에 관능미를 더하고 관객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다.
고급진 감상평은 못 되나,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취향은 참 한결같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최초의 누드 여신상이 등장한 이후 비너스는 늘 비슷한 몸매를 하고 있었고, 「밀로의 비너스」도 그 전형을 답습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지금도 최고의 미라는 칭송을 받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결국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을 마냥 찬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비너스라는 이름의 무게감과 달리 관객을 압도하는 ‘여신’의 아우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의 여신이라지만 그래도 ‘신’인데, 인간과 구별되는 신의 권능이나 특별히 인간이 경외할 만한 특징은 보이지 않았다. 팔까지 잘린 상태라 더 연약하고, 인간사를 다스리기는커녕 인간의 보호가 시급해 보였다. 그렇다면 비너스가 그저 섹시함이 전부인 신이었나 하면 역사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늘 문명 팽창 서사의 중심에 있던 비너스는 고대 로마에서 “한계 없는 제국” 건설의 동력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오죽하면 카이사르가 비너스의 후손임을 자처했을까.
그러나 인간들이 기억하는 비너스는 항상 외모와 몸매가 빼어난 비너스였다. 예술품을 통해 살아남은 비너스의 이미지는 사실상 좀 더 예쁜 인간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비너스상에 신의 능력이 배제되어 있다면, 뭇 여성들도 비너스의 외관을 닮기만 하면 충분히 여신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근대 유럽 여성들에게 비너스는 항상 추앙해야할 신이 아닌 ‘워너비 모델’이었다. 작품 속 비너스의 몸매는 아름다운 몸의 표본이 되었고, 여성들은 여신의 권능은 가질 수 없어도 그 외형만큼은 본받기를 원했다.
「밀로의 비너스」가 발견된 19세기에 마른 몸에 대한 집착과 비만 혐오가 서구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전에도 뚱뚱한 몸이 미의 기준인 적은 없었다. 오늘날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항상 날씬한 몸이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몸으로 인식되었다. 다이어트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 현대인들만의 고민은 아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좋은 몸’의 소유를 매우 중시했다. 이들의 사고관에서 육체는 정신의 거울이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신처럼 아름다운 몸을 지녔다면, 그것은 그의 정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표시라고 믿었다. 반대로 뚱뚱함은 외관상의 추함만이 아니라 정신적 불균형까지 의미하는 결함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다이어트에 힘썼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비만을 여러 질병의 원인으로 꼽으며, 비만인들에게 엄격한 식단관리, 강도 높은 운동, 심지어 구토를 추천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체관은 그들의 문화 예술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컨대 연극 공연에서 뚱뚱한 배우는 주정뱅이, 허풍쟁이, 게으름뱅이 등 부정적인 캐릭터를 전담했다. 우리가 ‘포토샵’에 열중하듯, 당시의 조각가들도 다리를 늘리고 뱃살을 집어넣는 식의 신체 보정을 당연시했다. 그 결과, 현존하는 고대 예술품에서는 비만인의 몸을 보기 어렵다.
이상적인 몸에 관심이 많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누드화 제작도 즐겼다. 그러나 원래 누드화는 철저히 남성의 몸에만 해당했다. 벌거벗은 비너스를 너무 자주 본 현대인에게는 의아할 수 있지만, 원래 여성의 나체는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이었다. 여기에는 남녀의 신체를 향한 뿌리 깊은 인식의 차이가 깔려 있었다.
그리스 남성에게 나체는 육체와 정신의 선함을 드러내는 자랑거리였다. ‘좋은 몸은 곧 좋은 사람’이라는 그리스 정신에 따라, 잘 만들어진 몸은 곧 내면의 용기, 결단, 끈기, 지성 등을 의미했다. 그래서 남성 시민들은 하루 종일 나체로 운동하며 몸을 가꾸었고, 그 몸을 뽐내기 위해 올림픽 경기에 나가 열심히 나체로 뛰어다녔다. 그런 그들의 몸은 고귀한 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여성의 몸은 ‘아름답고 악한 것(#kalon kakon)’이었다. 선과 악의 이중성을 지닌 여성의 신체는 남성보다 열등하며, 예측불허한 위험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여신의 나체를 봤다가 그녀의 심술과 저주에 봉변을 당하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그런 여성의 누드를 굳이 예술화하는 것은 고귀하지도 않고 위험한 일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이 금기를 깬 예술가가 프락시텔레스(Praxiteles)였다. 그는 최초로 실물 크기의 나체 여신상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 of Knidos)」를 제작했다. 그의 파격적인 여신상은 곧 그리스 최고의 화젯거리로 떠오르며 수많은 순례자를 크니도스로 불러모았다. 작품이 아름답기도 했겠지만 작품을 둘러싼 수많은 풍문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 작품의 모델이 당대 최고의 미녀, 고급 매춘부 프리네였다는 사실이 대중의 관심을 폭발시켰다.
발가벗은 여신의 인기가 높아지자 그 뒤로는 옷 입은 여신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프락시텔레스 복제본이 수없이 제작됐고, 색다른 포즈의 나체 비너스도 계속 등장했다. 「밀로의 비너스」와 마찬가지로, 이 여신들은 신체의 관능미를 제외한 어떠한 신적 권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너스는 더이상 진지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성들에게는 인간 여성을 대체한 미적 대상으로, 여성들에게는 이상적인 미적 기준으로 기능했다. 비너스의 몸에 쏟아지는 찬양만큼 더 많은 여성들은 자신도 그녀와 같이 되기를 꿈꾸었다.
정리하자면, 고대인의 인식에는 신체의 뚜렷한 선악 구도가 존재했다. 먼저는 ‘날씬함과 뚱뚱함’,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구도였다. 전자의 기준에 의거해, 남자든 여자든 탄탄하고 좋은 몸을 가져야 선한 것은 동일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남성의 몸이 선한 몸인 반면 여성의 몸은 선악이 혼재된 몸이었다. 남성이 뚱뚱한 것도 분명 악한 일이지만, 여성의 뚱뚱함은 더 거센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여성의 몸으로 뚱뚱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악하단 말인가?
이때 여성들에게 이상향이 되어준 비너스의 몸매는, 선악이 섞인 여성의 몸이라는 ‘한계’는 벗어날 수 없지만 적어도 ‘보기에는 선한 상태’였다. 그러니 여성들은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을 이루기 위해 그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애썼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 교리의 영향으로 신체를 향한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 고대세계에서 인간의 몸은 신과 그 형상을 공유하는,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중세인들에게 육신은 죄의 근원이자 타락의 결과물이었다. 육신 자체가 영혼 구원의 방해물로 정죄되자 뚱뚱함은 아주 속되고 불경한 상태가 되었다. 고대와는 사뭇 다른 이유로 비만은 중세 유럽에서도 악으로 남았다.
변화된 신체관은 식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대인이 아름다운 몸을 위해 절제된 식습관을 추구했다면, 중세인은 성스러움을 위해 금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음식은 종교적 수행을 저해하고, 육신을 태만과 정욕으로 이끄는 지름길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성직자들은 늘 굶주림의 고행을 통해 영적인 충만함을 유지하려 했다. 물론 금식은 평신도에게도 해당되었다. 중세 말에는 공식 지정된 금식일만 약 150일에 달할 정도였다.
“이렇게 단식을 밥 먹듯 하는데 애초에 살이 찔 수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중세인들은 단식 때문에 비만에 취약했다. 계절, 재난, 여기에 종교적 의무까지 더해져 음식이 풍족한 나날과 그렇지 못한 나날, 먹어도 되는 시기와 금식의 시기가 주기적으로 오갔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다이어트를 하다 ‘입이 터져서’ 요요를 겪듯 굶다가 많이 먹는 시기에 급격히 체중이 증가했다. 특히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큰 하층민일수록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는 안 좋은 식습관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비만은 꼭 탐욕과 무절제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 미술에서도 비만은 항상 성결하고 고귀한 것의 대립점에 놓여 있었다. 모든 육체미가 부정된 이 시대에 인간을 주제로 한 예술은 초상화 정도가 전부였다. 그 속의 통치자나 성인은 늘 마르고 수척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거룩함을 상징했다. 혹여나 작품에 비만인이 등장한다면 그는 노인, 병자, 하인, 악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컸다.
중세 말 근대 초, 인간의 몸은 다시 예술의 중심에 섰다. 여기에는 여러 사회경제적 요인이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단연 르네상스의 역할이 컸다. 부활,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14-16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문예 부흥 운동을 일컫는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재탐구가 이루어지며 다시금 인간성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스 예술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화가들은 인체를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다루었다. 예술 향유층의 다양화도 중요한 변화였다. 교회는 여전히 강력한 예술 후원자였지만, 경제적으로 성장한 부유한 평신도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예술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성속에 걸친 다방면의 작품이 제작되자, 그 안에서 인간의 몸은 상품가치를 띠게 되었다.
비너스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중세 내내 터부시되고, 성모마리아의 이미지에 감춰져 있던 비너스는 다시금 나체의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타났다.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었다. 서양화 최초의 여성 전신 누드화로, 금욕적인 중세 1000년을 보낸 15세기인들의 ‘동공 지진’을 일으킬 만한 작품이었다. 이것이 ‘몸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제 예술가들은 저마다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신체를 비너스라는 이름 아래 자유롭게 표현했다. 회화·조각·연극·오페라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당시 예술은 지금의 대중 미디어와 같았다. 그만큼 하나의 예술품이 유럽 사교계 전체에 일으키는 화제성은 대단했다. 비너스의 이미지가 반복해 재생산될수록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로 여겼다.
비너스 같은 몸매를 원하는 이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16세기를 기점으로 유럽의 먹거리가 풍족해지는 사회경제적 변화가 찾아왔다. 이는 대부분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도입된 쌀, 감자, 옥수수 등 고칼로리 작물 덕분이었다. 염장 기술의 발전으로 고기와 생선을 장기간 보존할 수 있게 된 점도 한몫했다. 이때부터 유럽은 과거보다 훨씬 더 ‘잘 먹는’ 사회로 나아갔다. 여기에 중세인을 굶주리게 했던 종교적 규율도 완화되어 근대인은 더 자유롭고 균형 잡힌 식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진짜로 잘 먹어서 살이 찌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먹거리의 최대 수혜자인 부유층에서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그것을 넘어 비만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너스의 몸매를 원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했을까? 여기서 그 유명하고 악명 높은 코르셋이 등장한다. 살을 빼기는 어려우니 뻣뻣한 소재에 뼈대를 덧댄 복대로 허리 살을 강제로 조였다.
종종 중세의 유산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형태의 코르셋이 등장한 것은 16세기 프랑스에서였다. 코르셋은 인체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먹을 것이 풍족해진 시대에 개미허리를 유지하고 싶은 여성들을 위해(?) 태어난 아주 근대적 산물이었다. 첫 등장부터 20세기 초까지 여러 단계로 진화하며 여성들의 기본 속옷으로 정착했다. 뼈대는 고래수염부터 강철까지 점점 단단해졌고, 길이·연령·체형별로 수많은 변종이 개발되었다. 19세기에는 유리잔 모양의 코르셋이 가장 인기 있었다.
19세기 말에는 마른 몸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지며 미의 기준이 다시 한번 강화된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깡마른 몸은 비만 못지않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상대적으로 좀더 통통하고 살집 있는 여성이 더 아름답게 간주되었다(그러면서 허리는 얇아야 했지만). 건강의 위험 신호로 읽힌 것도 비만보다는 마른 몸이었다. 그러다 세기말에 다소 갑작스럽게 호리호리한 몸이 남녀 모두에게 바람직한 상태가 되더니, 다이어트를 향한 사회 전체의 열기가 뜨거워졌다.
변화의 결정적 원인은 고열량 저가 식품의 등장이었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가난한 계층까지 배부른 식사를 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환경이었다. 잘 먹어서 살이 찌는 것도 나름 부자들만의 특권이었던 셈이다. 그랬기에 근대 유럽에서 비만은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의 표시라는 긍정적 의미를 덧입기도 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농업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식품 가공 공정 및 운송 시스템이 크게 개선되자, 거의 모든 계층이 다양한 고열량 식품을 소비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는 많이 먹어 비만이 될 가능성이 최빈층에게까지 열렸음을 뜻했다.
사회 전반에서 비만이 증가하자, 비만은 본격적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상류층을 중심으로 돈을 들여서라도 마른 몸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마른 몸은 산업사회의 기동성, 효율성, 생산성을 상징하는 ‘가장 현대적인 몸’으로 추앙되었다. 비만에 관한 연구와 다이어트 책이 쏟아졌고, 최초의 다이어트 클럽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상류층으로부터 시작해 노동자계급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마른 몸을 향한 사회적 열망이 자본주의를 만나며, 먼저는 미국에서 대규모 다이어트 산업을 탄생시켰다.
마른 몸이 미의 기준으로 견고해질수록 비만은 더 가혹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비만 여성을 향해 그들의 게으름, 무식함, 무절제, 문란함, 정신이상을 지적하는 온갖 심한 말이 쏟아졌다. 일례로 이탈리아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는 그의 책 『여성범죄인(The Female Offender)』(1895)에서 비만과 매춘 사이 정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폈다.
엘라 아델리아 플레처(Ella Adelia Fletcher)의 「아름다운 여성(The Woman Beautiful)」(1899)이란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모든 결함이 본질적으로 다 추하지만, 어떤 결함은 다른 것보다 더 수치스럽다. 그중 비만은 현저히 더 저급하다.” 이들에게 비만은 악이었고, 악을 악하게 평가하는 것은 정당했다.
고대로부터 끈질기게 이어져온 신체의 선악구도는 20세기를 앞두고 ‘마름과 뚱뚱함’의 대립구도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그와 동일한 역사의 그늘 아래 살고 있어서일까. 정도만 다를 뿐이지 그 시대의 험한 말들이 지금의 나에게도 그리 낯설게 들리지는 않는다.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모델 최소라가 나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루이비통 전속 모델로 계약돼 있던 그녀는 쇼 하루 전날 “좀 부어 보인다”는 한 마디 말로 쇼 취소 통보를 받았다. 그 충격으로 5주 동안 물만 마시며 179센티미터에 45킬로그램의 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소라, 너무 예뻐! 너무 멋져!”라고 극찬했고, 이후 그녀는 모든 브랜드가 사랑하는 톱 모델이 되었다. 그녀가 했던 이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내 몸은 지금 속이 다 걸레짝인데 사람들은 다 너무 예쁘대.”
그 말에 뜬금없이 「밀로의 비너스」를 떠올렸다. 언젠가 이 작품을 보러갔을 때, 열심히 여신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가이드에게 “팔이 없어 좀 무섭다”고 했다. 농담 섞인 진담이었다. 그런데 그 가이드는 “그게 작품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요소”라고 답했다. 팔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잘린 팔이 오히려 고대의 작품에 ‘모던함’을 불어넣어 작품의 세련미를 극대화한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예술을 논하자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 찜찜한 기분은 남았다.
최소라의 말에 ‘밀로의 비너스도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들은 두 팔 잘린 여신을 보며 “팔이 없으니 더 아름다워! 너무 모던해!”라고 품평하지만, 사실 그 여신은 팔이 없어서 불편하고, 아프고, 수치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도 사람들이 다들 예쁘다 하니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여신상의 모습이, 몸이 다 상하도록 극한의 저체중을 유지하는 최소라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비너스들도, 그들 나름의 비너스를 좇기 위해 여러모로 고충을 겪고 있는 듯했다.
그 속사정도 모른 채 그녀들처럼 되고 싶어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치면서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는 ‘비너스 워너비들’도 떠올랐다.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스스로 꽤 건전한 다이어트를 했다고 자부했으나, 돌이켜보면 다이어트를 하는 반년 동안 생리가 끊겼고 머리카락도 빠졌다. 밤이 되면 머리가 띵 하면서 빈혈기가 돌았다. 그때는 그게 갑작스런 생활방식의 변화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내 몸을 축내며 ‘미’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는 지금도 주변에서 혹은 미디어에서, 비너스를 좇는 이들의 여러 속사정을 듣는다. 그 안에는 자기혐오, 식이장애, 각종 질병의 이름이 아주 당연하게 등장한다. 이게 정상인가 싶으면서도 나 역시 속 시원하게 “야 때려쳐!”라고 말해줄 수도, 적절한 해결책을 줄 수도 없어 더 답답하기만 하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나는, 저마다 갖고 있는 비너스라는 이상향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외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때보다 각양각색의 비너스가 넘쳐나고, 그만큼 아주 혹독한 미의 기준이 많은 이들의 이상 속에 자리 잡은 시대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하면 건강한 정신으로, 건강한 생활을 하며, 건강하기만 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지, 이는 내게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
역사를 보면 호모 사피엔스들은 미에 관해서만큼은 참 한결같았다. 그들에게 외면은 항상 중요했고, 늘 모두의 신체를 선악의 구도에 넣어 선의 잣대로 악을 평가했다. 역사가 정말로 진보한다면, 그 역사의 연장선에 살고 있는 우리는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한 더 나은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뾰족한 수는 없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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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house, Rosalind (2008). "Obesity in Art – A Brief Overview." Obesity and Metabolism 36: 271-86.
생각 정리가 참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제 일상과도 밀접한 주제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독자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