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오 쿠니요시 <나의 남자>
2023년 어느 여름날, 우연한 걸음에 서울세계도시문화축제 현장을 들렀다. 광화문에서였다. 세계각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부스가 줄지어 있어 사우디아라비아 의상을 입어보고, 르완다 간식을 먹으며 신나는 시간을 보낼 때였다.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다양한 외국인 사회가 정착해 있음에 놀라던 중 가나 부스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방송인 샘 오취리였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왜 오랫동안 그를 방송에서 보지 못했는지 떠올리고서는 괜스레 씁쓸한 기분에 빠졌다. 서울에서 세계인의 화합을 다진다는 축제의 취지가 샘과 한국인 사이에서 벌어졌던 갈등과 상당히 대치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유별난 한국 사랑으로 이름을 알린 샘 오취리는 의정부고등학생들의 흑인 패러디 졸업사진을 인종 차별이라고 비판한 일로 몰매를 맞았다. 연이어 동양인 비하·성희롱 논란이 터지고, 해외 인터뷰에서 한국의 '캔슬컬처'를 지적한 사실이 전해지며 한국인들의 미움을 샀다. 배신감에 휩싸인 일부 네티즌은 한국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그의 방송하차, 심지어 추방을 청원했다. 그렇게 방송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샘을 다시 본 것은 몇 년 후 한 심경인터뷰에서였다. '그럼에도 한국을 사랑한다'던 그의 고백을 기억한다.
"한국에서 살고 싶고 한국을 좋아해요. 한국 사람들을 좋아해요. 한국 친구들이 굉장히 많아요. 한국어를 배울 때 정이라는 걸 배웠어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정이라는 걸 한국 친구들에게 느꼈어요." 다급히 애정을 토로하는 문장들에 마음 한편이 답답했다. 그를 좋아해서도, 그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흐릿한 10대 시절, 나의 첫 이방인 친구가 조심스레 건네온 이야기가 계속 샘의 말과 겹쳐 들렸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온 초록 눈, 금발의 소년 안드레.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뜬금없게도 동네 영어학원이었다. 그는 아주 유난스러운 학생이었는데, 한국 친구들 사이에 끼기를 거부라도 하듯 한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분란을 조장하고 미운 오리 새끼처럼 혼자 다녔다. 그때 모두를 경악시킨 가장 심한 모욕은 "한국의 월드컵 4강은 편파판정 덕분이다"였다. 그런 말을 지껄일 때면 늘 같은 생각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그럴 거면 니네 나라로 돌아가지 왜 여기서 살아?'
3여 년이 흐른 후, 놀랍게도 늘 재수 없기만 하던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순간이 왔다. 여러 학생이 오고 가는 동안 한 반에서 어쩔 수 없이 함께한 그와 나는 중학교를 떠날 때쯤 미운 정으로 얽힌 꽤 편한 사이가 되었다. 헤어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그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한국에 사는 주제에 왜 한국을 싫어하냐고. 익숙해진 한국 비하 발언을 예상하던 내게 그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말투로 의외의 답을 했다. "안 싫어해. 그냥 내가 한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계속 증명해야 하는 게 싫어." 적잖이 당황한 나로 인해 더 이상 대화는 없었지만, 나는 종종 그의 말을 곱씹으며 그 안에 담긴 진심을 가늠하려 했다.
안드레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존재에 이질감을 느끼며 그는 누구인지 도대체 왜 여기 있는지 설명받기를 원했다. '우리'끼리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한국을 욕하면서도, 그의 유사한 언행에는 즉시 돌을 던지며 그를 인성이 심하게 삐뚤어진 아웃사이더로 대했다. 우리는 출입국관리소장이라도 된 듯 은연중에 한국에 대한 그의 지식과 애정을 평가하며 이곳에 살 자격이 있다 없다를 논하고 있었다. 아마 안드레는 한국에 사는 동안 반복해서 같은 상황에 처했을 테다. 그제야 얼핏 깨달았다. 안드레의 얄미운 말과 행동은 실은 오랜 외로움에서 비롯된 반항의 표현이었음을.
샘의 인터뷰에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증명의 의무를 버거워하던 안드레에게 느낀 연민, 그와 유사한 감정이 올라와서였다. 경계에 선 사람은 늘 스스로를 정의하고 증명하는 데 남달리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 노력을 다하지 못할 경우 자신이 존재하려는 세계로부터 의심의 눈초리와 차디찬 홀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남의 나라 주변을 서성대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군말 없이 올라서야 할 당연한 시험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 날의 친구가 슬며시 꺼내 보인 상처 때문인지, 아무리 재주를 부리고 진심을 다해도 끝내 타인에 머물다가, 작은 실수와 불평에도 쉽게 내쳐지는 그들의 서러움이 무엇인지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미술 감상을 위해 꼭 작품의 시대 배경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때는 직관과 주관이 제일 좋은 감상의 재료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역사를 알면 그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야스오 쿠니요시(Yasuo Kuniyoshi, 1889-1953)의 「나의 남자」(1943)는 대표적으로 그러한 작품이다.
해변가 난간에서 흑발의 동양인 여성이 선원으로 보이는 금발의 백인 남성을 꽉 껴안고 있다. 짝다리에 팔짱을 끼고 멀리 응시하는 남자의 여유에 비해 여자의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하다. 두 사람 앞에 펼쳐진 하늘과 바다도 곧 다가올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듯 유난히 더 칙칙해 보인다. 처음 작품을 마주하고 「나의 남자」라는 제목을 확인했을 때, 이별을 예감하고 노심초사하면서도 애인을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여자의 의지가 엿보이는 그림이라 짐작했다.
생각이 깊어진 것은 이 그림이 일본계 미국인 화가 쿠니요시가 '무려' 1943년에 그린 작품임을 인지한 후였다. 1943년.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시점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적국인'이 가혹한 대우를 받을 때였다. 실제로 1942년에서 1945년 사이 수많은 일본인이 미군 부대로 징집되고 압류, 강제 수용, 가택 연금, 이동 제한 등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염두에 두면, 한 아시아 여성이 미국인을 끌어안고 "내 남자"라고 결의하는 모습은 단순 연애 감정으로 읽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하다.
다시 그림을 보았을 때, 여자의 위태로움이 마치 새 삶의 닻을 내린 조국 같은 나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이방인의 불안처럼 느껴졌다. 모래사장에는 하얀 피부, 금발의 세 여인이 느긋하게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그들이 누리는 안락함은 주인공 여성의 초조함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시대상황을 대입해 해석할 때, 네 여자 사이에는 나라를 잃을 리 없는 사람과 잃을 수도 있는 사람, 국가를 향한 사랑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과 증명을 요구받는 사람이라는 머나먼 간극이 있다.
쿠니요시는 제법 성공한 이민자 출신 화가였다. 1922년 뉴욕 데뷔전에서부터 호평을 받았고, 1929년 뉴욕현대미술관의 <현존 미국인 19인 회화전>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참여했으며(에드워드 호퍼도 참여했다), 1930년대에는 구겐하임 펠로십을 포함해 미국 예술계의 여러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미국인과 함께 활동한 쿠니요시였던 만큼 1941년 이후의 살벌한 상황은 그의 일상과 정체성에 큰 충격을 안겼다.
「나의 남자」는 쿠니요시가 '나의 나라'라고 믿어온 땅에서 이방인을 넘어 적으로 취급되던 나날에 그린 작품이다. 그때의 혼란한 심경과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그림에 대신 담아두지는 않았을까. 혹시 모를 그 마음을 읽어낸다면 불안정한 경계에 서본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보편적 서사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흑인 차별 논쟁이 일 때마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분개하는 포인트가 있다. 동양인 차별은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논의 대상도 되지 못할 만큼 외면당한다는 사실이다. 지금이 그 정도이니, 쿠니요시 당대의 미국은 절대 아시아인에게 호의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19세기말부터 서양을 괴롭힌 황화론(黃禍論, Yellow Perils)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았고,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가 황색 공포에 기름을 부으며 일본인을 향한 강한 두려움을 낳았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아시아 혐오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례는 1924년 이민법이다. 아시아계 인구 증가를 향한 우려가 잇따르자 연방의회는 새 법안을 통과시켜 아시아인의 이민을 전면 금지하고, 이미 이주해 있던 이들의 귀화를 막았다. 쿠니요시도 법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평생소원이던 미국 시민권을 죽을 때까지 취득하지 못했고, 첫 아내 캐서린 슈미트는 쿠니요시와 결혼하며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쿠니요시가 화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던 시절에 미국은 분명 동양인을 겨냥한 두꺼운 유리 천장으로 꽉 막힌 사회였다.
쿠니요시의 예술은 미국과 일본 사이 분열된 두 자아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1889년 일본 오카야마에서 태어난 쿠니요시는 열여섯 살에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 후 모든 생애에 걸쳐 일본에 돌아간 적은 딱 한 번, 1931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미 훨씬 오랜 세월을 미국에서 살고, 화가로서 사회적 안정까지 이루었던 터라 쿠니요시는 유년의 기억과 상당히 달라진 일본으로부터 거리감을 느꼈다. 미술상 친구 칼 지그로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에 와 기쁘지만 "결국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기에 가능한 한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심경이 적혀 있다.
쿠니요시는 항상 스스로를 미국인으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뿌리가 자신의 정체성과 예술적 실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 또한 인지했다. 적어도 1941년까지 그에게 예술은 대립하는 두 자아를 화해시키고 융합하는 장과 같았다. 쿠니요시의 주된 특징으로 꼽히는 '미국 민속예술과 일본 민속예술의 결합'은 그러한 의도를 잘 보여준다.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일본 미학의 차용은 쿠니요시뿐 아니라 당대 모더니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화법이었다. 쿠니요시는 같은 흐름에 올라타 스스로를 주류 미술계의 중심에 위치시키면서도, 일본에서 나고 자란 본인만 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개인적인 성찰을 작품에 담아냈다.
「골프선수로서의 자화상」은 교묘한 방식으로 화가의 이중 정체성을 표현한다. 우선 그림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일본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 높은 광대뼈, 찢어진 눈, 황색 피부 등이 '전형적인 동양인'을 표현하며,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자세에서도 일본의 영향력이 드러난다. 한편, 당시 미국에서 가장 트렌디한 의상을 입고 상류층의 여가인 골프를 치는 쿠니요시의 모습은 그가 미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사실과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암시한다. 사실 골프는 미국이 아닌 스코틀랜드 전통이라는 점에서, 화가가 미국 문화 본연의 융합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쿠니요시는 예술을 통해 "동양의 풍부한 전통"과 "서양에서 축적한 경험"을 화합하고자 했다. 활동 초기부터 그 목표를 활발히 실천한 결과, 1940년에는 <미국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연설을 맡을 만큼 명망 있는 '미국인 화가'가 되었다. 그가 정의하는 미국 예술이란 "다양한 민족적 관습과 전통의 집합"이자 "외래의 힘"이 더해져 "정점"에서 빚어내는 결과물이었다. 이 범주에 따르면 미국인 혹은 미국적인 것이 되기 위해 이국적 태생을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특성이 미국 문화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자극하는 긍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쿠니요시의 혼재된 정체성은 그가 두터운 유리천장을 뚫고 신선하고 창의적인 화가로 인정받기까지 톡톡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일본이 미국의 교전국이 되자 쿠니요시의 이중적 자아는 미국을 배신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위험 요소로 전락할 따름이었다. 그때부터 쿠니요시는 일본인의 얼굴을 한 채 일본으로부터 자라난 모든 마음의 줄기를 잘라내야 하는 쓰라린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이 미국을 향한 오롯한 사랑을 증명하고, 제2의 조국에게 버림받지 않을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공습은 곧바로 미국 본토에 사는 일본인의 안전을 위협했다. 격분한 미국인들이 충성이 의심되는 모든 적국인을 고발하기 시작하자 불과 5일 만에 일본인 1,370명이 체포되었다. 쿠니요시가 거주하던 뉴욕의 분위기도 살벌했다. 256명이 경찰서에 구류되는 동안 쿠니요시도 가택 연금을 당하고 카메라, 라디오, 망원경을 빼앗기고 은행 계좌가 정지되는 등 범죄자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짧은 며칠 사이 이 나라에서 나의 지위는 뒤바뀌었어. 나 자신은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도." 동료 화가 조지 비들에게 당시 쿠니요시가 보낸 편지 내용이다.
그동안 쿠니요시는 예술적 성취로 얻은 명성 덕분에 미국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정치 기류 속에서 미국 정부와 대중이 기억하는 쿠니요시는 '적의 얼굴'을 한 외국인 화가라는 사실뿐이었다. 혼합된 두 정체성 중 하나가 위협받자 남은 하나, 즉 일본인의 외형과 기원만이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쿠니요시는 미국에 애국심을 증명하고 다시금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일본계 예술인 위원회를 구성해 일본 군국주의 반대를 선언하고, 저명한 동료들로부터 충성 보증 서명을 받고, <일본에 맞서는 일본>이라는 라디오 연설을 작성하는 등 공공연한 방식으로 일본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대표적으로 미 전쟁정보국에서 반일 포스터 제작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일본군의 잔혹성을 널리 알려달라는 당국의 제안이 왔을 때 쿠니요시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그럼에도 일본인으로서 적국 일본을 그려내는 작업은 아주 골치 아픈 과제였는데, 미국인 편에서 일본의 횡포를 주저 없이 드러내면서도, 그 화살이 자신과 같은 일본계 이민자를 향하지는 않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쿠니요시는 동시대 선전화가들에게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바로 침략자와 희생자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피하고, 모호한 상징을 통해 비폭력, 자유, 인류애 등 보다 보편적 주제에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쿠니요시의 「무제(총검과 아기)」는 폭력의 가해자를 분명 일본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대개의 선전물에서처럼 일본군을 악마화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일장기와 총검의 이미지로 추상화한다. 이는 포스터의 감상자들이 적국 일본과 현실에서 마주치는 실제 일본인을 동일시하지 않게끔 의도한 결과였다. 「고문」은 한 발 더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뚜렷한 신분을 부여하지 않는다. 뒷모습만으로는 고문당하는 남자의 신원을 알아채기 어렵다. 그는 미국인일 수도, 독일인일 수도, 심지어 일본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쿠니요시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악행에 공감하면서도 "우리가 파괴할" "적"을 일본으로 제한하지 않고 인간의 잔인성을 부추기는 전쟁 그 자체로 돌려 말하는 화법을 주로 사용했다.
미국인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참여한 반일 선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대해 목소리를 낼수록 쿠니요시의 대중적 이미지는 점점 더 '일본인'으로 굳어졌다. 애초에 정부와 미디어가 그를 선전가로 원한 이유도 일본인인 그가 일본을 논할 때 더 신뢰가 간다는 판단에서였다. 쿠니요시는 늘 자신을 완전히 동화된 미국인으로 여겼고, 유년의 추억을 제외하고는 일본에 무지하며 남은 기억마저 부정확함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은 쿠니요시의 자기 이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의 인종을 근거로 그가 논하는 일본이 진실할 것이라(적어도 진실하게 비칠 것이라) 믿었고, 그의 손끝을 통해 일본의 악랄함을 확인받기를 원했다. 어느새 쿠니요시는 가장 유명한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쿠니요시는 일본을 저격하는 활동으로 전쟁 중에도 안전하게 미국에 머물렀다. 그 열정적인 노력 끝에 전후에도 예술가로 남았다. 1948년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첫 회고전의 주인공이 쿠니요시였다는 사실로 그의 활동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인 화가로서 미국 예술을 정의하던 위상은 사라진 후였다. 쿠니요시 사후에는 '적국의 진실을 밝히던 일본인 화가' 정도로만 이름이 남고, 더 중요한 그의 예술적 재능과 성취는 빠르게 잊혔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쿠니요시의 존재가 다시 떠오른 때는 1948년 개인전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2015년이 되어서였다.
“나의 외모는 동양인이지만 나의 신념, 이상, 정서는 대부분의 일생을 미국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 살면서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미국인이며 모든 것을 그 방식대로 보고 느낍니다." 예술을 매개로 두 정체성의 화해를 시도하던 쿠니요시는 외모 외에 조국으로부터 받은 모든 유산을 부정하면서까지 미국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려 했다. 그럼에도 경계로 내몰린 그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안정적인 발디딤을 하지 못하고 서글픈 짝사랑으로 끝났다. 그 필연적 결말을 알고 나니 「나의 남자」 속 여인의 불안한 사랑이 마치 쿠니요시의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남자를 끌어안은 여인의 애타는 마음을 빌려, 사실은 미국을 붙들고 속삭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유일한 '나의 나라'라고. 조국이 당신을 대적하더라도 나의 충성과 사랑은 여기 그대로 남아있다고.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그런 간곡한 고백을.
안드레와 자연스레 멀어지고 나이를 먹으면서, 안드레처럼 이국적 외모의 이방인만 경계를 서성이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크고 작은 복수의 집단에 속해 사는 인간에게 국적과 인종은 정체성을 결정하는 꽤 중요한 범주이지만 절대적인 안정의 기반이 되지는 못 한다. 더 넓은 사회로 나올수록 여러 기준에 의해 중심과 주변이 나뉘고, 자신이 선 위치에 따라 절대적 혹은 상대적 가장자리의 쓸쓸함을 경험하는 순간들이 온다.
대학동기 A는 입학과 동시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서울살이의 어려움을 털어놓던 그는 서울에 집을 사기 전까지는 스스로 외지인이라는 생각에 편안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붙임성까지 좋던 여자 동기 B는 어느 날 슬며시 내게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왜 연애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곤란해하던 그녀는 비밀리에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무리에서 점점 멀어졌다. 퇴직을 앞둔 교수님은 당신의 처지를 뒷방 늙은이라 자조하셨고, 대기업에 입사한 분교 출신 친구는 본교 출신 동료 모임에 끼지 못하는 현실을 씁쓸해했으며, 일찍 엄마가 된 친구는 여자로서의 자아를 잃어간다며 슬퍼했다.
누구나 갖가지 이유로 경계에 선다. 삶의 전환점에서 낯선 자신을 마주하거나, 어느 집단에도 마음 편히 속하지 못할 때 자신을 정의하는 단어들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테두리가 불명확한 나의 상태로 인해 어디를 가나 긴긴 문장으로 나를 설명하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서울대에서 서양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 사학과 졸업생도 서울대 학부 출신도 아니라는 이중의 비정통 신분으로 주눅 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책을 출판한 이후에는 "너의 다양한 면모가 단점이 되지 않게 정체성을 잘 확립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조언에 혼란을 겪기도 했다.
경계인의 불안을 배워갈수록 안드레의 외로움에 조금 더 공감했고, 쿠니요시의 선택이 매국이 아닌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투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마도, 앞으로 또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섣불리 나의 잣대를 들이대며 재단하기보다 진중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편을 택할 것 같다. 내게도 나와 다른 세계를 향한 편견과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어떤 기준에서는 나 또한 이방인이자 주변인이기에 어쩌면 나를 향한 연민으로, 그들에게도 그들의 여러 모습을 조합해 가장 만족스런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다. 그 사이 발생하는 갈등 중에는 서로를 향한 존중이 가능해지는 순간 해결되는 사소한 오해도 숱할 것이다.
경계에 있다는 말은 더 다채로운 세상을 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의 중심만 잡는다면 그에게는 누구보다 풍부한 서사, 흉내 낼 수 없는 개성, 어디로 뻗을지 모르는 가능성이 있다. 그가 혼돈 너머 그 단계로 도약하기를 기다리고 응원한다. 나는 그를 다리 삼아 한정된 시야 너머로 건너가, 이제껏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무관심하던 것들을 사랑하며,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비로소 이해하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ShiPu Wang, Becoming American? The Art and Identity Crisis of Yasuo Kuniyoshi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1).
__________, "Japan against Japan : U.S. Propaganda and Yasuo Kuniyoshi's Identity Crisis," American Art 22, no. 1 (2007).
Gail Levin, "Between Two Worlds : Folk Culture, Identity, and the American Art of Yasuo Kuniyoshi," Archives of American Art Journal 43, no. 3/4 (2003).
Joseph Jonghyun Jean, "Breakfast at Kuniyoshi's : Photography, Forgetting, and Racial Form," Journal of Asian American Studies 22, no. 2 (2019).
Tom M. Wolf, The Artistic Journey of Yasuo Kuniyoshi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2015).
출간 이후 거의 4달 만에 새 글을 올리네요! 그동안 책 봐주시고 감상 나누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요. 감사한 경험이었고 가능하다면 다음에는 더 좋은 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
쿠니요시에 대해선 한 7월 초부터는 알아보기 시작했는데요, 어느 정도 글을 써두고 이 글을 올릴지 말지 고민이 되어 좀 묵혀두었습니다. 업로드를 재개하면 너무 긴 텀을 두고 않고 연재를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더불어 <사적인 그림 읽기>와 같은 형식의 글을 계속 쓸 수 있을지에 대한 심리적, 시간적 부담이 있었어요. 한 편 올리고 또 오랫동안 사라지고 싶지는 않아서 ^^... 여러모로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가을이 다 되어 가네요.
그러다 문득 쿠니요시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제가 마주한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학자와 작가의 삶 사이에서 무엇에 더 투자해야 할지,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야 할지 그런 고민을 계속 해왔거든요. 그래서 일단 어떻게 되든 이 글은 올려야겠다, 내가 공감이 되니까 하는 마음이 들어 공개를 결정했습니다 :)
막상 글을 수정하고 마무리 짓다 보니 다시 재미가 스멀스멀 올라와 계속 연재하고 싶다는 마음도 드네요? 책에 수록된 열다섯 편의 글만으로는 무언가를 보여드리기에 부족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조금 뜨문뜨문할 수도 있고.. 출간 후에는 글을 더 잘 써야 한다는 부담도 있지만...! 지금껏 그랬듯 저의 일상과 생각을 예술의 도움으로 더 잘 기록해 두겠다는 마음으로 써내려가 보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보내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