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서울의 봄>을 봤다.
18세기 유럽 지성인 다수는 꽤나 확고하게 공화정은 근대국가에서 실현될 수 없는 정치체제라고 생각했다. 이는 공화정의 기틀이 다름 아닌 시민의 애국심이기 때문이었다. 애국적인 시민이란, 국토의 일부를 소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부로 스스로를 무장해, 국가 위기 시 ‘내 땅’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전쟁에 뛰어드는 이들을 의미했다.
근대인이 보기에 단일 공동체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토가 커지고, 시민군이 아닌 거대정부에 예속된 상비군이 국방을 담당하며, 국경 너머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불안정한 자산(화폐, 주식 등)에 의존하는 근대사회에는 국가를 내 몸 바쳐 지켜낼 ’내 것‘으로 사랑하는 시민 사회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상업 발달이 허락한 즐거움에 취해 ‘개인’의 성공과 안위에 모든 인생을 걸 뿐이었다. 그 상태에서 공화정이 실현된다면, 각자 자기 삶만 돌보는 동안 패악한 1인이 등장해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고, 공화정을 왕정보다 더 악한 군사 독재정치로 빠뜨릴 것이라고 근대인들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고대로부터 반복되어온 공화정의 서글픈 운명이었다.
그러니 <서울의 봄>이 보여주는 애석한 역사는 사실 공화정을 꿈꿔본 모든 공동체가 경험한, 특별히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은 일반적인 이야기다. 놀라울 것이 있다면, 자기 나라에서 딱히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실은 참 조용히도 국가를 ‘내 것’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자격 없는 누군가가 통째로 도둑질해 갈 때 그 꼴을 견디지 못하고 젊음을 내어주며라도 내 몫을 되찾으려 했다는 사실, 당연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그 원대한 힘이 이 작은 나라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공화정의 암울한 전망에 굴복한 과거의 지식인들은 자기 것 빼앗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범인의 소유욕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음이 분명하다.
- 2024. 01. 05 오후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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