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엔데.
그의 책 모모를 읽은 후부터 나는 미카엘 엔데를 향해 자랐다.
모모와 같이 심오한 상징으로 인생의 진리를 말하는 동화같이 아름다운 책을 쓰겠다는 소망이 가슴에 생겼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런 책을 쓰지 못하고 있다. 대여섯 권의 책을 썼지만 그건 모두 심리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최면 분석과 의식 무의식 작업을 해왔고, 그로 인해 심리책을 쓰게 된 것이랍니다.} 그래도 아마도 미카엘 엔데를 향해 3분의 1쯤 온 것 같다.
미카엘엔데에게 이르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3분의 1은 그저 조금 상징과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정도
의미 정도를 해독해 낼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일 뿐이다.
모모
모모는 사람의 말을 아주 깊이 경청하는 떠돌이 방랑 소녀다.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났다. 모모는 폐허가 된 원형경기장 한 귀퉁이에서 살았는데 친구가 된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방을 수리해 주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모를 찾아와 자기 이야기를 하고 갔다. 그들은 모모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문제의 해법을 떠 올리거나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것을 알았다. 창작자는 모모에게 이야기를 하면 계속해서 스토리를 떠 올릴 수 있었다.
모모의 듣기, 내가 모모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듣기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그냥 막연히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좋은 일인가 보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심리상담을 하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듣기가 어떤 것인지 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모모의 듣기는 이런 것이다.
이야기하는 상대에게 온전히 모든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듣는 사람은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그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빨리 "나도 알아!"라고 말하고 싶은지 또 "조언이나 충고"를 하고 싶은지, 혹은 설명을 하거나 거들거나 혹은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이 모모의 듣기의 위력을 조금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모모같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즉 이야기하는 내내 조금도 가로막히지 않고, 내 이야기가 가치가 있거나 없거나 판단당하지 않고, 상대방은 지루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그저 내가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나의 귀가 되어 주기를 원하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무의식적이며 자기 자신이 그렇지 못할뿐더러 그 자신도 대부분 인생에서 그와같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이 모모의 듣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독일인 의사 라하샤가 진행하는 카운슬링 코스에서였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한 사람은 듣고 한 사람은 말하게 했는데 이때 이야기하는 사람은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말해야 했고 듣는 사람은 그저 이야기하는 사람의 눈을 쳐다만 볼뿐 어떤 제스처나 말도 금지당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문득 스스로 이 이야기가 어떤 가치가 있을까? 계속 말할 가치가 있을까? 스스로 검열했다. 그녀는 내게 어떤 지지도 하지 않고 계속하라는 어떤 사인도 주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스스로 힘을 내어 계속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해 나가다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나는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무한한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오열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허접한 내 이야기를 한마디 가로막지 않고 들어준 사람은 그녀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 내게 붓다나 신 혹은 천사처럼 느껴졌다.
전 인생을 통틀어 상대방이 그토록 아름답고 순수한 존재로 보이고, 그의 존재에 무한한 감사함이 폭발하여 그토록 울었던 경험은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라하샤의 안내에 따른 과정을 진행했을 뿐이었는데도 그런 경험이 일어났던 것이다 .
모모의 듣기가 이런 것이었다.
말을 하다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나고, 그 자신의 내면이 열리고, 어떤 무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게 하는 그런 경청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상보성의 원리가 지배한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안이 있으면 밖이 있고 하는 식이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듣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둘이 짝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밖이라면 듣는 사람은 이야기 안쪽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외부로 나올 때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의 내면을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상담 몇 년 하고서 완전히 소진되고 고갈되어 나가 떨어져 지금 기능을 멈춘 채로 시골을 떠 돌고 있다. 나
는 상담하는 동안 아주 대단히 진지한 경청자였다. 물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담자가 와서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그 문제를 풀어내는 세션을 진행하고 그가 해결되어 가뿐해져 일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숨 한번 내쉰 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주의와 에너지를 집중했다.
이런 모드가 아닌 나를 챙기고, 매뉴얼 대응으로 돌아설라치면 절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상담이 매뉴얼 대응이다.)그런 대응이라면 내담자는 차라리 박사나 교수 혹은 유명한 곳을 찾아가려고 했다. 나에게는 늘 다른 것을 기대하고 왔다.
듣기는 이런 것이기도 한 것이다. 불꽃이 빛을 내며 이야기하는 동안 계속해서 그 자신은 짧아져 가는 촛대와 같은 것인 것이다. 우리는 듣기만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야기 하는 사람이 가벼워져 가는 동안 듣는 사람에게는 무거움이 쌓이게 된다. 꽃 한송이가 피어 나는 동안 그 꽃 한송이가 피어 날수 있는 온 우주가 되어 주는 일, 그렇게 자신을 내어 주는 일이 듣기다.
아마도 부부간에 그리고 부모 자식간에 혹은 지인간에 이런 듣기가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러면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고, 또 서로가 서로 온 우주를 헤메어 찾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임을 알게 된다.
수많은 갈등의 원인이 "가르치고싶음"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치려 할때 이미 상대의 존엄성은 훼손된다. 잘못한, 문제가 있는, 어리석은 이런 모든 의미들이 가르치려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미 판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진지한 경청은 상대를 그저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하는그들은 모두 빛을 내며 살아난다.
듣기는 상대를 조금도 부족하거나 고칠것이 없는 완전한 하나의 우주로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꽃처럼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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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쓰려고 했는데 또 장문 충이 되었네요.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시 2편으로 이어 모모 이야기를 끝내야겠네요.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요. ^^ 읽어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