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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스 Apr 13. 2018

내 인생의 작가 미카엘 엔데 그리고 그의 책 모모 2

거북이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어린 꼬맹이 소녀 모모가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저녁,모모 앞에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그리고 카시오페이아라고 하는 이 거북이는 모모를 데리고 회색 도당들이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거북이 카시오페이아는 모모의 통찰력을 상징한다. 심오한 경지의 듣기를 통해 모모는 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듣기의 선물은 통찰력이다. 그런데 모모의 거북이 카시오페이아는 통찰력에 예지력을 더해 무려 5분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 


전환


그리고 그 이후부터 세상은 더 이상 모모가 알고 있던 세상이 아니었다. 이때까지 여유롭고 따스하고 자연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조급하고 기계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시간을 은행에 저축하기 위해서였다. 

모모의 삶은 대 전환을 맞이하고 새로운 장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이 시점부터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야 했다.  그것은 '소명의 부르심'이다.  모든 영웅들에게는 이 소명의 부름이 있고 그리고 세상을 구할 운명이 짐 지워진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뚜렷이 드러나는 때, 여러분은 그때를, 그 지점을 지났는지 나는 묻고 싶다.  10대 20대 때 나는 이것을 알기를 소망했었다. 30대가 되어도 나는 이리저리 헤매고 이것저것을 배우고 했지만 알지 못했다. 아,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알 수 있다면 라면을 먹고살아도, 바보 등신 병신 소리를 들어도 오직 그것을 하며 살리라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산다면 정말 행복 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가슴 뛰는 일을 찾지 못했다. 돈도 벌어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나는 착실하게 돈을 벌어 모으지 못했다. 돈이 조금이라도 손에 들어오며 그것을 찾아 나섰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배우고 찾아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했다. 


이야기 속에서 모모에게는 카시오페이아가 나타나면서 아주 쉽게 그런 때가 온 것 같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상징성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이미 성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그렇게 된 것럼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고 있다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다. 

나는 내 길을 발견하기 위해 먼저 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하루 세 마디밖에 안 하던 그 남자와 사랑에 빠져야 했고 그가 허용해 주는 공간 안에서 자기 치유를 해야 했다. 10년이 넘는 자기치유의 시간들을 그는 정말로 너그럽게  견뎌주고 함께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40대가 가까워서야 상담이라는 내 운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완벽한 타임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자기 삶의 길을 찾는 모든 이들이 인도하심을 받기를, 모두 자기의 때, 자신의 소명을 만나기 위한 모든 조건들이 성숙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기를,   


회색 도당들 

 

회색 도당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은행에 저축하라고 계산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낭비하는 시간을 계산하여 엄청난 숫자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언제나 입에 시가를 물고 뿌옇게 연기를 내뿜으며 나타났는데 시가는 사람들이 저축한 시간이었다. 만약 시가가 다 타고 새로운 시가를 피울 수 없으면 그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사람들이 저축한 시간으로 시가를 만들어 피우며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회색 도당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 모모는 1973년도에 출간된 걸로 나는 알고 있다. 이때에 미카엘 엔데는 앞으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개념' 혹은 '사이버'나'이미지' 혹은 '숫자'같은 것들에 의해 지배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은유는 갈수록 더욱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설명해주는데 적합하게 될 것이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사이버 세상이 커지고 또 가상화폐까지 등장한 시점에서 더욱 이 회색인들의 비유는 맞아떨어지게 될 것이다.   


시간의 근원 


그러나 회색인 들은 이런 것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회색인 들은 허상이며 유령과 같은 것이며 환상과 같고 또 꿈과 같은 것 또한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모는 결국 시간이 시작되는 호라 박사의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시작되는 곳이라면 곧 창조가 시작되는 때, 모든 존재가 시작되는 그 근원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은 이 세상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색 도당들은 붓다나 예수 그리스도나 바바지 같은 이들이 말하는지 마야적인 세상 즉 환영이며 꿈이라고 보는 세상인 것이다. 모모는 시간의 근원을 찾아가 환영을 없애고 실재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걸음으로 걸어가기 


 모모가 호라 박사의 집에 도착하는 것을 막으려는 회색 도당은  필사적으로 추격해 오지만 모모는 천천히 자기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사실 우리 모두의 삶은 늙음이나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시간의 근원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간에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조금씩이라도 통찰력이 생긴다. 그 통찰력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로 하고 또 문제를 해결하면서 커진다. 그래서 통찰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해결뿐만 아니라 문제 또한 잘 보이게 되고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게 된다. 자기 문제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 석가모니 붓다가 결국 인생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게 된 것처럼.


이때 생존문제나 그 자신의 각종 유혹이나 욕구에 딴지가 걸리고 또 서둘러 문제 해결의 욕구 혹은 깨달음의 욕구에 밀어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서두를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매사에 많이 서두른다. 그러나 서두름이 일을 망치는 경우 또한 아주 많다. 또한 서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그 많은 일들을 기적으로 생각하거나 필연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가만히 일상을 관찰해 보면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보다 노력과 상관없이 그저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주어지는 일들이 몇 배 더 많다. 내가 노력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다. 사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다. 


스팀 잇에서 우리가 글을 올릴 때도 누가 나에게 보팅을 해 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우리는 기대하고 나름대로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글을 올리는 일뿐이다. 보팅은 내 노력이나 애씀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글과 보팅 사이에는 어떤 연결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isis가 그 글에 보팅을 하는 것은 글쓴이 입장에서는 우연이고 필연이며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나에게 보팅 좀 해줘.라고 일일이 다 말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말해도 다 보팅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처럼, 


이런 부분을 살펴보면 삶은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하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이 실은 사랑이라는 바탕 위에서 돌아가고 있으며 모든 존재의 목적과 기능이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모모가 터벅터벅 자기 걸음으로 걷는 것은 그래서 너무도  타당한 것이다. 서두르는 사람은 결코 자기 걸음으로 가는 사람을 앞지를 수 없다.  정말 그렇다. 회색 도당들은 결코 모모를 앞지르지 못하고 앙굴리 마라 또한 붓다를 앞지르지 못했다. 예를 하나 들면 내가 아는 한 동생은 언제나 주식이나 도박 혹은 회사를 차려서 한번 크게 벌려고 했고 그 언니는 언제나 차분하게 회사를 다니며 번 돈을 저축했는데 언제나 동생이 언니에게 손을 벌리는 일도 그렇다. 이런 경우 심심치 않게 본다.


앙굴리마라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앙굴리마라는 잘못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은 천명의 사람을 죽이면 성불하고 해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는 인도의 쉬라바스티라는 숲에 숨어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튀어나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조건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했다. 그 악명이 높았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석가모니 붓다께서 그곳으로 가셨다. 석가모니 붓다는 평상시의 걸음으로 걸어가셨다. 앙굴리마라가 숲에서 보고 뛰어나와 죽이려고 붓다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붓다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 중놈아! 거기 서라!" 앙굴리 마라가 헐떡거리며 소리치자 그때 붓다께서 걸음을 멈추었고 그제서야 앙굴리마라는 붓다곁에 다다랐다. 그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앙굴리마라야 나 멈췄다. 이젠 네가 멈출차례다."  아, 붓다의 걸음 그리고 그의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붓다께서 연꽃위에 안자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붓다는 단번에 조급하고 거친 앙굴리마라의 진동을 자신과 같이 차분하고 단아하고 고요한 진동에 조율되게 했다. 붓다의 힘이다. 그리하여 앙굴리마라는 자신이 잘못된 법을 실천하는 것을 깨닫고 붓다에게 귀의하여 진실된 법을 수행했고 그 역시 붓다가 되었다. 모모의 걸음 또한 붓다의 걸음이다. 


실제로도 자기 걸음이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빠르다. 그러니 남의 걸음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것 같고 가장 뒤쳐진 것 같아도 자기 삶에는 그것이 가장 알맞은 걸음이고 가장 빠른 걸음이다. 남의 걸음으로 걸으려다 얼마나 많이 주저앉고 포기하는가?  


거꾸로 가기 


드디어 모모는 회색 도당들을 따돌리면서 시간의 근원, 호라 박사의 집 근처에 이르렀다. 그런데 모모를 거의 다 따라잡아서 막 손만 내 뻗으면 모모를 잡아챌 것 같은 거리에 있던 회색 도당들이 갑자기 컨베이어 벨트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모모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수많은 회색 도당들이 더 열심히 뛰어서 모모를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모모로부터 그리고 회색 도당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아항, 모모는 그곳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곳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모모는 호라 박사의 집을 향해 거꾸로 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호라 박사의 집에 도착했고 회색 도당들은 모모를 영원히 놓쳐 버렸다. 


아! 정말 이 책은 너무도 심오하다. 마음의 근원, 혹은 존재의 근원에 다다르면 반드시 거꾸로 걸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이곳은 위를 보며 걸을 수 없다. 오직 아래를 보며 걷는 곳이다.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계곡을 향해 내려가는 것이며 성취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비우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멀어져 가게 된다. 이곳에서는 한없이 느리게 가야 한다. 이곳에서는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가기 어려워진다. 바보가 되어야 한다. 이곳에서는 안다고 하면 갈 수 없다. 오직 모른다고 해야 갈 수 있다. 


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명상이 유행인 이 시대 온갖 고학력자들이 명상을 하며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고 온갖 똑똑한 사람들이 정신과 마음 그리고 의식의 신비를 풀고 붓다처럼 모든 고통을 끝내는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고 있다. 인터넷 곳곳에 정신적 고수들이 있고 구도자들 명상가들의 커뮤니티가 있고 그런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 숨은 명상가들이 있다. 그래도 깨달은 사람은 왜 이렇게 적을까? 그들은 너무 똑똑해서 거꾸로 갈 줄 모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대학공부나 대학원 공부와 같은 방식이면 지구 상 인구의 반은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은 경쟁하고, 비교하며, 성취하며, 제일먼저, 뛰어나게, 인정받으며, 똑똑하게 달려오던 그 달리기를 멈추지 못한다. 거꾸로는 더더욱 하지 못한다. 먼저 이 거꾸로 가기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근원에 이를 수 없다.    

  

또한 이 거꾸로 걷기는 회색 도당들을 없애는 것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삶에 어느새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회색 도당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누군가 가졌다면 해답은 지금까지 살던 것과 거꾸로 살아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호라 박사의 집에 도달한 모모가 호라 박사가 낸 수수께끼의 해답을 맞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모모가 존재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의 근원으로 되 돌아간 이야기다. 누군가 존재의 근원에 도달했다면 그가 걸은 길이 남는다. 이책 모모는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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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누군가 읽어주시는 행운이 있기에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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