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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슬린 Apr 05. 2022

이진, 희도는 없고 우리 부부에겐 있는 것

이진이 좀 더 징징거렸다면

(본 글에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달 동안 우리 부부를 설레게 만든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끝이 났다. 백이진(남주혁)의 플러팅(소위 여우짓)과 나희도(김태리)의 풋풋함에 우리 부부는 호들갑을 떨며 서로의 팔을 때렸고, 조용하다 싶으면 둘 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평소 스릴러, 호러 장르만 좋아하는 남편이 ‘멜로가 체질’ 이후로 또 한 번 과몰입한 드라마였다.


희도에게 이진은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본인보다 자신을 더 믿어주는 존재였고, 이진에게 희도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다시 일으킨 존재였다. 둘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하고 각별했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사랑의 방식이 달라서 둘은 헤어진다. 희도는 이진의 슬픔, 아픔, 기쁨, 행복 모든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이진은 희도를 조금이라도 힘들게 할 생각이 없다. 그런 이진에게 희도는 ‘우리는 좋을 때만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좋지 않을 때는 서로에게 짐이라고, 사랑하긴 한 거냐 아프게 덧붙인다.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져 있을 때도 응원이 닿았던 두 사람이지만, 연인이 된 후 각자의 자리에서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응원이 닿지 않는 걸 느낀 희도는 서서히 헤어짐을 겪는다. 둘은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 방식으로는 함께 할 수 없음을 안다.


그런데 둘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응원이 닿지 않아서 헤어진 게 아니다. 서로의 사랑과 응원으로 마음이 자라서, 이제 서로의 응원 없이도 살아갈 수 있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서로의 사랑이 부실했다면, 오히려 둘은 쉽게 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둘의 사랑은 너무도 단단하고 건강한 나머지, 헤어짐으로 완성된다. 부모의 부재와 시대의 아픔, 청춘의 상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외롭고 빨리 커버린 이진과 희도에게 사랑은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의 것이어서, 마치 웃자라버린 아이의 서글프게 어른스러운 감정이어서, 너무 빠르게 피고 져버린 것이 아닐까. 둘이 마지막 포옹을 하던 그 순간 만발했던 벚꽃잎처럼 너무도 예쁘고 아쉽게 말이다. 마지막 회를 보면서 아, 이 드라마 단순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라 성장 드라마였었지, 결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모니터에다 대고 박수를 길게 쳤다.


너무 슬펐지만 너무 예뻤던 장면. (출처 tvn)


이진이 뉴욕에 가고, 둘이 멀어져 가는 과정을 보면서 결혼 전 우리 부부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상황은 다르지만 똑같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시간들. 우리는 만난 지 서너 달 만에 중국과 한국으로 떨어져서 8개월 만에 한번 찰나 같은 몇 주를 보내고 다시 떨어져 있곤 했다. 그런데 우린 그때 더 단단해졌다. 남편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나와 결혼해도 좋겠다는 결심을 했고, 나는 내가 남편에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는 일종의 효능감을 느꼈다.


그때의 이진, 희도에겐 없고 우리 커플에게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어리광’이었다.(길바닥에 드러눕는 생떼를 말하는 건 아니다) 힘들 때, 괴로울 때 아이처럼 솔직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것, 괜히 상대의 마음을 생각하느라고 내 어려움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그리고 상대는 그걸 가만히 들어주다가 나름의 최고의 격려와 해결법을 전해주는 것. 그리고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미안함보다 고마움을 훨씬 더 많이 표현하는 것. 건강한 관계에서는 힘든 순간일수록 이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갈급하며 징징거리는 아이를 달래며 부모 자식이 애착을 형성하듯, 어른이 된 우리들의 새로운 애착 형성에도 어느 정도의 어리광은 필요하다는 걸 돌이켜보며 느꼈다.


당시 남편은 내가 베이징에 와서 겪게  고충을 비롯해 회사에서의 위치, 아직 있지도 않은 미래의 자식 걱정까지 온갖 걱정과 불안으로 쉽게 잠들지 못할 정도였는데, 남편은 이진처럼 혼자 감내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 이야기하면서  시간이고  괴로움의 실체를 묘사하고 파헤치는 쪽이었다. 나는 남편의 다채롭고 생생한 걱정의 향연을 목도하게 되어 대략 난감하면서도 그의 불안한 내면을 살뜰히 나눠들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그리고  위로와 조언에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오은영 박사님이  마냥 뿌듯해지기도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을 풀어헤쳐  좋은 방법을 찾아냈고,  끈끈해졌다. (결혼한 지금도 남편은 현관문을 여는 동시에 회사에서 있었던 고민을 쏟아낸다.)



실제로 오은영 박사님은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K-장남, K-장녀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조언을 해주신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부모 혹은 가족간의 관계에서 ‘의존적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겉으로는 의젓하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하지만, 내면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남아있다는 것. 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이 건드려질 때마다 섭섭하고 화가 나거나 무리한 행동을 하는 등 여러 행동들로 발현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오은영 박사님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징징거릴 것’을 조언한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에서는 ‘정상적 퇴행’이 있다고. 어리광을 부리거나 징징거림을 통해 의존적 욕구를 채우고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백이진.. 무죄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이진에게도 이런 ‘정상적 퇴행’이 좀 더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외롭게 컸지만 그만큼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희도에게 조금 더 힘들다고, 괴롭다고 징징거렸다면 둘의 결말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랑을 너무도 일찍 완결 내버린 이진과 희도가 다음번 사랑은 조금  오래도록 어리게, 조금은 어리광을 부리고 들어주면서 사랑을 이어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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