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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슬린 Apr 09. 2022

베이징의 채도가 높아졌다

색깔을 빼앗긴(?) 베이징에도 봄은 온다

베이징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차가운 한겨울 계절 탓도 있었겠지만, 보이는 모든 게 회색빛이었기 때문이다. 꼭 누가 일부러 세상의 채도를 -10 정도로 낮춰놓은 느낌이었다. 공항도 불을 반쯤 꺼둔 듯 어딘가 모르게 어둑어둑.. 표정 없는 무뚝뚝한 공항 직원들도 회색 인간 같았다.


입국 후 격리 동안 묵었던 호텔은 한쪽 벽면이 통창으로 되어있었는데, 3주 동안 같은 장면을 보다 보니 비슷한 회색빛에서도 미묘한 색감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됐다. 그 말은 눈으로 측정하는 대기질 지수가 점점 정확해졌다는 말이기도 했다. 회색보다 파랑이 선명하게 짙은 날에만 창문을 열었고, ‘파란색’ 공기만 들이마시려고 했다. (당시는 올림픽 준비 기간이라 공기질이 좋은 편이었는데, 덕분에 파란 하늘을 꽤나 자주 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올림픽 블루’라고 한다. 자매품으로 ‘양회(兩會) 블루’도 있다.)

3주 동안 매일 본 베이징 풍경.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청량한 파란 하늘색을 볼 수 있는 날은 점점 귀해졌다. 그리고 바람이 창문을 뜯을 기세로 대차게 부는 날에야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중국인 선생님은 이것이 마치 인생 같다고 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거였다. 나는 중국에 와서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우울하진 않았다. 무채색이 디폴트가 된 곳에 떨어지고 보니 우리가 당연하게 가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이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색깔은 사람이 사는 데 필수 조건은 아니었고, 뭐 조금 흐리게 살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베이징 그레이’에 완전히 익숙해진 무렵, 한국에 계신 엄마가 집 앞 아파트 단지와 하천에 만발한 벚꽃, 개나리, 목련, 유채꽃 사진을 보내주셨다. 어김없이 ‘벚꽃 시즌’이 온 것이다. 본가가 있는 부산을 시작으로, 서울 친구들까지 카카오톡 프로필이 핑크로 물들기 시작하고, 인스타도 벚꽃으로 도배가 되었다. 시원하게 파란 하늘색과 대비되는 핑크 벚꽃 색깔이 올해 유난히 진해 보였다. 어쩐지 우리 집 창밖은 조금 더 회색이 되었다.


인생을 다채롭게 살아보고자 중국에까지 왔는데, 어쩐지 원래 알던 색마저 조금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베이징 그레이에 안주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듯, ‘색깔을’ 조금 빼앗긴 베이징에도 봄은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땐 항상 눈에 레이더를 단 마냥 부지런히 색을 감지하고 다녔다.


사실 중국에도 벚꽃 나무는 곳곳에 있는데, 어쩐지 한국보다  예뻐 보였다. 수형도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있고, 꽃잎도 한국만큼 풍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대체로 뿌연 하늘이다 보니 벚꽃의 여린 핑크색이 너무도 쉽게 묻혀보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진한 색상의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다..) 공원에서 유난히 예뻐 보이던 자목련을 보면서, 중국인들이 강렬한 채도의 빨강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올림픽 공원(森林公园)의 자목련

그렇게 레이더를 켜고 다니다 보면, 어떤 날엔 길에서 꽃을 파는 분을 발견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마트리카리아 길바닥에 한아름 놓여있었다. 회색 도시 한가운데서 만난 마트리카리아는 한국 꽃집에서보다 오히려  새초롬하게 반짝거렸다. 작년 가을 제주도에서 들꽃 느낌의 웨딩 촬영 부케로 쓰고 싶어 찾다가 꽃집을  군데나 들러서야 겨우 구할  있었던 꽃이다. 그리고 생긴 것과 다르게 들꽃 같지 않은.. 가격에 손을 떨며 샀던 마트리카리아를 단돈 10위안(2  정도) 집으로 데려올  있다는 , 중국이기에 대신 누릴  있는 특권이기도 했다. 어쩐지 정말로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봄은 아직 잃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무채색 우리 집에도 색상 팔레트가 하나 더 늘었다.

십수 년 전에는 당연하게도 존재했을 베이징의 파란 하늘색이 지금은 사라진 것처럼, 어쩌면 또 얼마 후에는 자주색 목련을 피우는 봄도 자취를 감출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지, 속 편하게 자조하기 전에 당연하게 얻는 것도, 그리고 당연하게 빼앗기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중국인들도 좀 더 찐하게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올림픽, 양회 맞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가짜 파랑 말고, 베이징의 진짜 속살 같은 파란 하늘을 되찾는 일에 진심이었으면, 그리하여 두 눈에 레이더를 밝히지 않아도 다채로운 중국의 색깔을 좀 더 만끽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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