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 준비
2022년 겨울.
다시 한번 런던을 찾기 위해 준비 중이다.
유럽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나에게는 유럽에 대한 역 향수가 생겼다. 그곳에는 여전히 내가 살았던 집, 내가 살던 동네, 거리, 단골가게,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을 텐데, 그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느끼는 공허함,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을 채우고자 일 년에 일 유럽여행의 계획을 매년 꾸역꾸역 채워나갔었다. 하지만 2019년의 유럽여행을 마지막으로, 코로나19와 함께 이 야심 찬 계획은 점점 이어지지 못했다.
코로나19 앞에서 유럽이라는 곳은 멀리 있는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먼 유럽뿐만 아니라 가까운 동남아로의 항공도 막혀버렸으니, 전 세계적 재난 앞에 유럽은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세계가 된 듯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쉽게 끝나니라 생각했던 코로나19는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나만 해도 벌써 두 번의 코로나 확진으로 두 번의 격리생활을 했는데, 이런 경우는 주변에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코로나19는 더 이상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무자비한 질병이 아니고, 계절이 바뀌면 찾아오는 감기처럼 흔한 질병으로 느껴지는 상황까지 왔다. 이런 분위기의 변화는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기에 딱 좋다.
코로나19에 대한 분위기 변화와 함께 나를 흔들어 놓은 것이 또 있다. 올해 5월, 아시아나항공으로부터 받은 마일리지 안내 메일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뻔질나게 해외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던 시절. 항공을 이용해야 할 때면 주로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했다. 항상 특가, 프로모션 등을 이용했기 때문에, 적립되는 마일리지가 없거나 적었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찔끔찔끔 모르는 마일리지 언제 다 모아서 쓰겠나 싶어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 마일리지가 나름 차곡차곡 모여있었고 어느덧 유효기간에 도래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1년의 연장기간이 주어졌는데, 그마저도 올해 까지란다.
보유 마일리지 중 4,717 마일리지가 2022년까지 유효하다는데, 항공 마일리지 세계에서 이 정도는 꽤나 큰 수치다. 그냥 날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거다. 코로나19가 잠잠해져 가면서 이제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마당에, 여행 중독자들의 엉덩이가 들썩 거리고 있는 이 시기에! 이렇게 마일리지를 날릴 수는 없지! 항공사에서 발송한 짧고도 간결한 안내 이 메일은 내 마음속 깊숙이 꽁꽁 봉인해 놓은 유럽으로의 열정에 완전히 기름 부은 겪이었다.
그리하여! 기다리면 뭐하나. 유효기간이 도래한 마일리지를 포함하여 보유한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서 인천 출발, 런던행의 마일리지 항공권을 구매했다. 유럽으로의 마일리지 항공권은 편도 1회에 35,000 마일리지인데, 내 마일리지로만은 부족하기 때문에 가족들 마일리지까지 당겨와서 탈탈 털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11월 항공권(편도) 구매를 완료했다. 뿌듯했다. (마일리지 항공권은 해당 마일리지를 사용과 함께 유류할증료와 세금은 따로 결제해야 한다. 2022년 5월 기준, 약 23만 원 결제했다.)
여기까지만 하고 끝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뭐든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항공권을 구매하고 나니 (비록, 아직 편도뿐이지만) 주변에 자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원래 진짜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표를 사는 것부터라고도 하지 않는가. 여행 계획 짜기는 돈 안 들이고 행복 회로 돌리면서 하기 때문에, 백번이고 천 번이고 취소하기와 수정하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비행기표는 지정된 날짜에 꼭 사용되어야 하는 큰돈 들어가는 이동수단 비용이기 때문에, 결제하는 순간 현실이 된다. 비행기표를 결제하는 순간 여행은 빼박인 것이다. 그 빼박의 시간이 온 것이다.
" 나 이번 겨울에 영국에 가기로 했어! 비행기 표도 이미 끊었는걸! (아직 편도지만) " 이렇게 자랑의 자랑을 하고 다니다 보니, 주변에서 같이 가도 되냐는 질문이 여럿 들어왔다. 혼자 급발진해서 편도 항공권만 구매해놨을 뿐이지 따로 생각해놓은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가면 나야 좋지! 하는 상태였다. 날짜가 괜찮으면 나는 얼마든지!
이렇게 혼자 저지른 일정에 혹시 동행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행할 일자의 항공권을 구매하면 금액이 얼마인지 알아봐 두는 것도 좋겠지. 그래서 항공권 가격을 확인해보고자 아시아나에 들어가서 항공권 검색을 해보았다.
응? 이 화면은 오류인가? 다시 시도해보았다. 음, 오늘 아시아나 사이트 점검하는 날인가. 다음날 다시 해보았다. 음, 내가 날짜를 잘 못 알고 있나. 내 마일리지 항공권 날짜를 다시 확인해봤다. 맞는데? 내 항공권의 날짜는 11월 18일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항공 스케줄이 없죠?
아시아나에 문의를 해보았다.
답변의 대략적인 내용은, 런던 항공권의 11월 스케줄이 아직 확정이 되지 않았으며 현재 확정된 10월까지의 스케줄에는 금요일 운항이 빠졌는데, 그 때문에 11월 항공 스케줄에도 금요일이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것 또한 확정 스케줄이 아니며, 최종 스케줄 확정돼서 스케줄 변동이 확실시되면 다시 안내하겠다고 했다. (6월에 주고받은 내용이다.)
무슨 소리지. 당황스러웠다. 내가 항공권을 구매할 때만 해도 있었던 항공편이 지금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지만, 일단 스케줄에는 미 표기되는 거고(왜냐하면 10월 스케줄에 없으니까), 이게 있을지 없을지 확정이 되면 다시 알려줄 텐데 지금은 일단 미표기를 한다고? 맞나?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이야기일까.
그러니까 내가 언제 런던을 갈 수 있다는 소리인지, 없다는 소리인지. 스케줄이 생길지 안 생길지 알아맞혀 보세요라고 나한테 말하면 나는 숙소를 예약하라는 소리인지 말라는 소리인지. 이런 상태라면 함께 여행할 동행자를 구해도 문제다.
재문의를 해보았다. 재문의 내용은, 현재 11월 18일 항공편이 미정이라고 하니 항공권을 우선 11월 19일 자로 변경하고 싶다. 추가로, 혹시나 추후에 다시 11월 18일 항공편이 확정이 된다면 다시 항공권 일자를 바꾸겠다. 이 문의에 대한 답변이 왔다.
항공 스케줄이 확실한 11월 19일로 항공편 날짜 변경은 가능하지만, 수수료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 운항 스케줄에 없는 11월 18일 항공편은 정확하게 취소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날짜 변경이라 하더라도 무료 변경이 안된단다. 또한, 19일로 항공편을 바꿨다가 다시 18일 자로 변경하면 그때 또 수수료가 든단다.
스케줄 꼬이게 만든 건 아시아나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다. 아, 정확하게는 무료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어이가 없어서 그 후로도 몇 번의 재문의를 했지만 답변은 한결같았다. 감정 없는 AI 같이.
5월에 결정한 런던행 비행기표는 일자가 확정되지 못한 채로, 6월, 7월, 8월이 지났다. 일자가 확정되지 않아 숙소를 예약도 못했고, 주변에도 더 이상 말하고 다니지 못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냥 다 취소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가 비행기표를 끊어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렇게 편도만 끊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9월 23일. 결국 11월 18일 항공편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