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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Nov 12. 2024

(26) 그레이카드

평택 고덕 반도체 숙식 노가다

안녕하세요.

평택에서 숙식 노가다를 했습니다.

지난 글은

(1)평택 고덕 삼성반도체 건선현장 숙식 노가다 체험기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784024

(2)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숙식 노가다(2)-고덕의 하루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816539

(3)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3) - 하나도 못 알아 듣다, 언어의 전환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824903

(4)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4) - 어쩌다 이곳에? 당연히 돈 때문에 왔지!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838875

(5)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5) - 이모(E-Mo) 네트워크 이야기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849953

(6)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최근 소식, 이모(E-Mo) 네트워크가 특별한 이유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863337

(7)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두 계단 위에 서 있는 사람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878405

(8)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이곳은 AI로부터의 피난처?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932355

(9)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슬로우 다운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064741

(10)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공수지옥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071733

(11)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완벽한 잠을 찾아서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086088

(12)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완벽한 잠을 위해 한 일, 깨달음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110282

(13)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정말 이게 다야? 이렇게 간단히 살이 빠진다고?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199842

(14)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저녁 식사를 아침으로 미루면서 체험한 효과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253832

(15)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삼성은 안전한가?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264633

(16)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돈을 모은다는 것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277955

(17)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밴드 공고 보는 법!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316321

(18)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호캉스? 노노 빌캉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462490

(19)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메가 스트럭쳐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494065

(20)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나의 몽골 도서관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519888

(21)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멋진 책 소개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583266

(22)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불가리아의 100만달러 크리스틴(1)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747328

(23)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불가리아의 100만달러 크리스틴(2)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750082

(24) 평택 고덕 반도체 공장 노가다 - 대가리가 깨끗해 지는 곳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810118

(25) 가장 원초적인 형벌 - 평택 고덕 반도체 숙식 노가다

https://damoang.net/tutorial/11787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금 논란이 되는 글일수도 있어 조심스럽습니다.

규정에 어긋나는 불법작업에 대한 글입니다. 당연히 생명에 위험이 되는 작업이야 규정을 지키지만 애매한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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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필름 사진을 배웠습니다. 아버지의 장농이벤트(대학 간 아들에게 장농에서 자신이 쓰던 물건을 물려주는 행사. 많은 아버지들의 로망) 를 통해 얻은 펜탁스 필름 카메라로 수많은 필름사진을 촬영했고 교양수업도 신청했습니다.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그레이카드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당시 노출도 제대로 몰랐던 저로서는 굳이 저런게 있어야 하나 싶은 물건이었습니다. 가격도 꽤 비쌌고 고작 회색종이 비슷한 물건이 필요한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빌려주신 그레이 카드로 노출을 맞춰보니 확실히 색감이 달라졌습니다. 나중에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흐린 날 오히려 사물의 색상이 더 잘 보입니다. 구름 덕에 햇빛이 차단되어서 세상의 기본 색상이 회색이 되기 때문이죠”


처음엔 와닿지 않았지만 어느 날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이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본 새빨간 장미가 유독 다른 날보다 더 빨갛고 생생하게 보였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밝은 날 강한 햇살 아래 꽃이 제일 화사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흐린날, 세상이 우중충할 때 바라본 장미꽃에서 진한 붉은 색을 경험했습니다.흐린 날씨는 멀리 있는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사회에서는 이른바 그레이존이라는 걸 배웁니다.

뭔가 애매한 영역, 좋고 나쁨을 나눌 수 없는 일들을 말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만화영화에는 빌런들이 무조건 세계 정복을 꿈꾸는 나쁜놈으로 나오지만 최근에는 과거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좀 더 입체감 있는 캐릭터로 만듭니다. 실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나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게 위험한 일인 것도 깨닫습니다. 


현장에서도 그레이존을 경험합니다. 규정대로 하는 작업도 있지만 어긋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른바 ‘불법작업’입니다. 


오기 전 고덕 현장에 관한 글들을 보면 불법작업에 대한 글들이 많습니다. 불법작업만 전문으로 하는 팀이 있고 자기들만의 암구호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법작업 하다 걸려서 쉬고 있다는 등 그런 글들을 볼 때 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법작업 한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떳떳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이곳에 작업하다 보면 도저히 규정상으로는 작업이 불가능하거나 허가 받기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곳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작업이든 2인1조가 기본입니다. 그러다 한명이 급하게 다른 일에 투입되면 남은 1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기에 주변을 슬쩍 보고서는 얼른 간단한 일을 합니다. 


튀어나온 전산볼트 하나가 녹방지 스프레이가 안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스프레이를 사용하려면 방독면을 쓰고 안전관리자에게 보고해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 모든 절차를 지키려면 반나절이 금방 흘러갑니다. 많은 경우 한명이 망을 보고 얼른 스프레이를 꺼내 칠해버립니다. 


또 현재 규정으로는 작업이 불가능한 장소가 있습니다. 뭔가 애매한 작업들은 안전관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런 작업에서 사람들은 몰래몰래 작업을 진행합니다. 1분만에 슬쩍 주변을 보면서 잠깐 작업하고 나오면 반나절 걸릴 일이 끝나 버립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동료가 작업을 할 때 안전관리자가 돌아다니는지 감시하는 일을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불법작업 자체가 불법인데 그걸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이곳에 와서 처음에는 그런 행태가 단순히 귀찮음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규정대로 좀 하지 왜 이리 어기지 못해 난리일까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곳

새로 설치된 기계의 천장 부분에 마킹 하나가 잘못되어 감리 분들이 지적을 해왔습니다. 안전 규정에 따라 그러한 부분을 수정해야 했으나,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다리를 이용해도 닿을 수 없는 위치, 기계를 밟고 가자니 고소작업 위반, 아예 안전 관리자 조차도 이건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함께 일하는 프로님도 속이 타고 있었습니다. 며칠을 그곳을 지나가며 함께 고민하고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앓고 있었습니다.(현장 인원은 반장님, 삼성 직원은 뒤에 프로를 붙입니다)


사실 그냥 밟고 올라가서 마킹을 하고 오면 됩니다. 하지만 명백히 규정에서 말하는 고소작업에 위반되기 때문에 누구도 나서 작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프로님은 갑자기,


“커피짱조아씨”


예?


“주변 좀 봐주세요”


그는 훌쩍 장비위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재빨리 주변을 스캔했지만 파란모자(안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세상에 결국 일정때문에 프로들도 이런 일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몇분도 채 안되어 마킹 작업을 끝낸 프로님이 다시 훌쩍 뛰어서 바닥에 착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어난 일있습니다. 


"에효. 예전엔 날라다녔는데 저도 나이들고 살찌니까 예전만도 못하네요 ㅋㅋ" 


하.. 조마조마 했습니다. 프로님.. ㅜㅜㅜㅜ


"다쳐도(걸려도) 제가 다치는게 훨씬 낫죠" 


그분은 머쓱이 웃으며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가끔은 안전관리자도 현장의 일정과 복잡함을 알기에 못본척 하는 일도 있습니다. 잠깐이라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적당히 하세요” 라며 웃으며 지나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화이트와 블랙 사이

현장에서 수많은 변수들, 상황을 맞이하면서 모든 걸 이분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항상 화이트존에서 작업을 하고 싶지만 제 스스로 블랙은 아니지만 어두운 그레이존으로 이동할 때도 있었습니다. 동료들도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일이 진행이 안돼”


어떤게 정답일까요?

그레이존안에서는 수많은 대답이 있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그레이존을 목격합니다. 정시퇴근이 계약서상에 있지만 상사가 퇴근할 때 까지 무급으로 야근을 합니다. 환자는 고통속에 많은 진통제를 원하지만 의사는 규정에 따라 더 이상 지급할 수 없습니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친환경 제품을 출시하지만 불필요한 폐기물만 늘어날 뿐입니다. 


그레이존에서는 수많은 대답이 있습니다. 누구도 정답이라 하기 애매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골치아픕니다. 


퇴근하며 그린3동을 빠져나옵니다. 흐린하늘을 보니 오래 전 교수님이 들고 있던 그레이카드가 생각납니다. 



분명 칙칙하고 먼지 투성이 현장이지만 이상하게 많은 것이 보입니다. 게이트로 향하는 파랑, 초록, 흰색, 민트색 등 다양한 색의  안전모. 옆으로 지나가는 레미콘 트럭에 붙어있는 시멘트 자국들, 통제하는 이모님이 들고 있는 경광봉이 유난히 빨갛게 보입니다. 


블랙 & 화이트의 시각을 갖고 살아왔던 때를 생각합니다. 머리 아플일도 없지만 보이는 것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일들을 경험하며 그레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레이존에 있는 이유는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함이라 생각하며 게이트를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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