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왔던 나의
제 8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 소감
비밀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 합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고 누구에게도 들킨 적 없는 꿈이죠. 오랜 시간 가슴속에 품었지만 이제는 미련 없이 놓아준 꿈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네, 제가요. 알고 보면 노래를 좀 합니다.
시작은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새 교복도 친구들도 전부 낯설기만 했던 새내기 시절이었죠. 저는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학교보다 훨씬 힘들겠지만 힘든 만큼 재미있는 일도 많을 것 같았거든요. 특히 기대했던 건 동아리였습니다. 성장드라마 <반올림>의 애청자였던 제게 어른스러운 선배들과 함께하는 동아리 활동은 잘나가는 고등학생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동아리 신입생 모집 기간이 시작된 것이죠. 2학년 선배들은 쉬는 시간마다 1학년 교실에 내려와 동아리를 홍보했습니다. 사진 동아리는 카메라가 없어서 안 되고, 맛집 탐방 동아리에 들어가기에는 용돈이 부족하고, 영어 말하기 동아리는 감히 넘볼 수도 없고, 방송부 면접은 이미 떨어졌고.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공부나 해야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교과서를 펼치는 순간 드르륵 앞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한 무리의 멋진 언니 오빠들이.
합창부였습니다.
쉬는 시간이 아닌 수업 시간에 찾아온 그들은 선생님을 향해 패기 넘치게 인사한 뒤 말했습니다. 합창부에 들어오면 맛있는 칼국수를 사주겠다고요. 피자도 햄버거도 아닌 칼국수에 그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마음을 빼앗긴 건 그 말을 한 선배가 당시 인기 있었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정말 고등학교 합창부 오디션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었고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오디션은 음악실에서 열렸습니다. 지원자들은 애국가 1절과 자유곡 하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긴장이 다 풀린 줄 알았는데 제 차례가 다가오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애국가에 이어 자유곡까지 부르고 나니 사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정적을 깨고 단장 선배가 입을 열었습니다. “야, 쟤 뽑아.”
네, 제가요. 알고 보면 노래를 좀 합니다.
그렇게 오디션에 합격했습니다. 막상 들어와 보니 선배들은 어린 꼰대처럼 군기를 잡았고, 아이돌을 닮은 오빠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습니다. 연습에 잘 나오지 않았거든요. 왠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쩌겠어요.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연습하는 수밖에요.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디션 때까지만 해도 단장 선배의 총애를 받았던 저는 몇 달 뒤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연습 때는 잘하다가도 무대에만 올라가면 실수를 연발했거든요.
세상에는 주목과 관심을 받을수록 능력치가 떨어지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걸 무대 공포증이라고 한다는 것도,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지만 그때는 영문도 모른 채 스스로를 미워했습니다. 아아,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하던 지랄도 멍석 깔아 주면 안 한다.
할머니는 종종 이런 말을 하셨는데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뜨끔했습니다. 너무나도 제 얘기라서요. 그렇습니다. 저는 늘 멍석을 깔아 주면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아무래도 유명인이 될 팔자는 아닌가 봐요.
<우리 세계의 모든 말>이라는 멍석은 이슬이 깔았습니다. 특별한 날이면 저희는 서로에게 아주 긴 편지를 씁니다. 재작년 생일에는 이슬에게 무려 네 장짜리 편지를 받기도 했었죠. 그런데 그 편지들이요, 이런 말은 좀 민망하지만 저희가 읽으면서도 참 아름다워서요. 우리는 어쩜 이렇게 편지를 잘 쓸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감탄하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번에도 도망칠 생각이었어요. 막상 멍석을 깔아 주면 형편없는 편지를 쓰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발을 빼지 못했습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거든요. 그때 저는 일 년 가까이 단 한 편의 원고도 쓰지 못하던 상태였습니다. 슬럼프였을까요, 번아웃이었을까요. 어느 쪽이든 이대로라면 전부 끝나버릴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했어요.
그래, 멍석 위로 올라가자.
숨겨왔던 나의 모든 걸 보여주지 않으면 다음은 없을지도 몰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구질구질한 마음, 너무 좋아서 나만 알고 싶었던 책, 깊은 우정을 나누면서도 끝내 말하지 않았던 진심. 이슬이 깔아준 멍석 위에 그런 것들을 꺼내 놓았습니다. 쓰면서도 이게 맞나 고민하면서요. 스스로의 작은 재능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요.
그리고 결국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 저희가요. 알고 보면 편지를 좀 씁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속수무책으로 들떴던 12월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1월이 되니 마음이 차분해지네요. 저의 새해 목표는 하던 지랄을 멍석 위에서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글쓰기만큼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요. 아주 많은 것들로부터 도망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만 도망치고 싶습니다.
겁 많고 걱정 많은 저희의 도전을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름에 책으로 다시 찾아올 <우리 세계의 모든 말>에서는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