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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김밥 Jul 25. 2024

모르는 번호로 전화받았다

(고덕에서 인생 후반 #7)

내 휴대전화는 좀처럼 울리지 않는다. 어쩌다 전화벨이 울릴 때, 스팸 전화라도 반가울 때가 있다. KT에서 한 달에 한번 잔여 통화 가능 시간을 알려주는데, 나는 그 문자를 무시한다. 내가 사용한 통화 시간은 끔찍할 정도로 작다. 누군가 내 통화 시간을 본다면 '묵언 수행' 중인 스님으로 나를 착각할 거다. 코로나에 걸려 본 적이 없다. 전화로 코로나가 전염되는 건 아니지만, 내 사회성은 그만큼 낮다.  


그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 세요?" 으레 스팸 전화겠거니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상대를 확인하고자 답을 했다.

"아~ 네, 여기는 방송 저작권 관련 라이선스를 관리하는 곳인데요.. 혹시 000 작가님 아시나요?"

"제가 아들인데요" 나는 깜짝 놀라 답을 했다.

브런치에 "아버지의 글" 제목으로 글을 올린 날은 7월 14일인데, 아버지의 저작권 라이선스에 대한 전화를 이틀 뒤인 7월 16일에 받았다. 이틀이라는 간격이 너무나 묘했다.


상대방은 내가 아들인지 확인했고, 아버지의 부고장에서 내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글로 발생한 저작권료를 내가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다고 하면서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혹시... 생각지도 못한 돈이 들어오는 건가? 아버지 글이 재방송되거나 DVD로 판매되는 경우가 있나? 저작권료라니, 역시 창작 활동으로 돈을 번다는 건 멋진 일이야...' 통화 후 입금이 될지 궁금해했다. 그럴 일은 극히 희박할 거라 생각되어, 아내에게 이를 말하지는 않았다.




"모르는 번호 전화받았다면? 먼저 말하지 마세요"라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짧은 통화로도 목소리를 녹음한 뒤 딥보이스(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특정인의 목소리를 똑같이 내는 기술)로 보이스피싱에 악용할 수 있으니, 보이스피싱을 예방하기 위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 먼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

'엇, 혹시 그날 통화가 낚시성 전화?', 갑자기 의심이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날 내가 먼저 말했는데...'


오후에 같이 맨발 걷기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의심만 더 증폭되었다.

"정말 이상했어. 왜 내가 블로그에 아버지에 대한 글을 올리자 바로 아버지 저작권료에 대한 연락을 할 수 있지? 혹시 내가 은퇴 자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걸 노리고, 일부러 접근한 거 아냐?"

"그 전화번호 확인해 봤어? 당장 모든 계좌 비번부터 바꿔!"

걷는 속도가 빨라지고, 아내의 목소리 톤도 높아졌다.

"연락을 다시 준다고 해놓고 왜 전화가 없지? 혹시 내가 먼저 내 계좌번호를 밝히기를 기다리는 중인가? 블로그에 올린 돈 이야기 글을 삭제해야 할 것 같아."

"쓸데없이 돈 이야기는 블로그에 왜 올려?"

걷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시민대학에 내 개인정보 사용에 동의했는데, 그거 다시 동의하지 않음으로 바꿔야 하나?"

"경찰서에 그 전화번호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요청할까?"

"..."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내가 요즘 이혼 전문 변호사나 검사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드라마처럼 전화 통화의 진위에 대해 모든 경우를 따지며 추리했다.


맨발 걷기는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급히 끝났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물이 발목까지 차오른 한강 뚝방길을 뛰는 듯 걸어야 했다. 오후가 지나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즈음이었지만, 시꺼먼 먹구름으로 천둥 번개까지 치니 사방이 불길하게 어두워졌다. 공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밝은 희망은 누군가가 내 돈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검은 의혹으로 뒤바뀌었다.




그날의 사건은 또 다른 추론으로 내 마음속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모르는 번호 통화 사건이 희미해져 갈 때쯤, 나는 시민대학에서 진행하는 6주짜리 인생 디자인 프로젝트 성과 발표회에 참석했다. 그때 팀원 한분이 내게 물었다.

"'아버지의 글' 정말 뭉클하게 읽었어요. 진정성이 느껴지더라고요. 거기 사진도 직접 찍으신 거죠?"

"아, 네..."

바로 그때 '그 블로그에 올린 사진과 인용글이 내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사진과 글은 원래 아버지께서 방송작가 협회나 잡지에 기고를 위해 넘긴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부 사진과 글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럼 내가 저작권을 침해한 건가? 새로운 시각으로 그날의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다.


방송작가협회가 내가 블로그에 담은 사진이나 글이 저작권을 위반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했을 것이다. 내가 아들임을 확인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고, 그냥 돌려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통화를 끊은 거였으리라. 사실 나는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진과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 인용한 것이었는데, 아마도 저작권 침해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글로 자동 탐지된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정리되었다.




이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하고 묻어두려 했다. 하지만 최근 글감이 부족했던 나는 이 사건을 블로그 글로 써보기로 결심했고, 이참에 깔끔하게 그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 일주일 전에 저희 아버지 저작권료 관련해서 통화했는데요, 혹시 제가 올린 블로그 글 때문에 전화하셨나요?"

"그건 아니고 적은 액수지만 아버님 저작권료 있어요, 저희 방송작가협회에서 다른 작가분들 경우도 다 함께 모아서 처리 중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결국 쓸데없는 의심을 한 셈이었다. 그래도 그날의 통화 덕분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 추리를 실컷 해볼 수 있었는데, 치매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개인정보 보안과 저작권 침해 문제에 더 주의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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