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정 Oct 24. 2023

[시즌2] ep 4. 평생 단 하나의 운동을 한다면

2023. 4. 24. 

2022년 7월, 회사에 휴직원을 냈다. 마음 같아서는 멋지게 퇴사원을 내고 싶었지만(!) 극단을 선택하기 전에 한번 쯤은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뭘 원하는 사람인지, 자유를 원하는지, 안정을 더 원하는지. 30여 년을 살아도 내가 나를 모르겠어서, 큰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먼저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반백수가 됐다. 직장만 없으면 자유인이 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발을 담가 둔 곳이 많아 그러지 못했다. 원래 살고 있는 순천에서, 그리고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몸과 마음을 특히 오래 두었던 곳은 집 앞 요가원이었다. 우리 요가원에서는 요가가 끝난 후 찻자리가 자주 벌어진다. 새벽이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차 한잔씩 하고 가실래요?” 라는 선생님의 말에 도반(함께 수행하는 ‘벗’을 의미한다)들은 공연히 분주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한쪽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곤 한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아무리 바빠도 차 한 잔 마실 시간 쯤은 있다고, 아니 있어야만 한다고 나를 달래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휴직 기간 동안 가장 좋았던 건 여유롭게 아침 찻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거다. 새벽반 도반들과 꿀 같은 사바아사나(요가의 마무리 동작, 송장자세)를 마치고 나면, 선생님이 내려주신 보이차를 마시고 약과며 초콜릿 같은 주전부리를 나눠 먹었다. 좀전까지 요가로 소모한 칼로리를 훌쩍 넘게 먹어 도루묵이 된 날도 많았지만, 살 빼자고 요가를 하는 사람은 없었는지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뭔가를 씹고 마시고 말을 나누다 보면, 한 시간이 넘는 수련에도 여전히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그제야 조금씩 깨어났다.


차와 술은 비슷한 점이 많다. 한참을 마시고도 배가 부른 줄을 모른다. 마시다 보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흐른다. 한 시간은 기본이고 두 시간씩 대화가 끊어지지 않아서 다음 수업 도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서야 “세상에!”하면서 엉덩이를 뗄 때도 있다. 어떨 때는 술을 마신 것처럼 텐션이 훅, 올라오기도 한다. 이야기 주제는 요가와 차 얘기부터, 부동산, 아이, 회사 등 무궁무진하다. 최근에는 함께 수련하는 도반 중 세 명이 동네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로 동시에 이사를 가면서 찻자리가 더 시끌벅적하기도 했다.


그동안 새벽요가가 끝나면 출근 준비를 하러 부리나케 집에 가기 바빴는데, 나만 쏙 빼놓고 다들 이렇게 재밌게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약이 올랐다. 찜질방이나 미용실, 카페에 모여 앉아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의 마음을 십분 알 것 같았다. 아니, 아줌마들은 이 재밌는 걸 매일 한다는 거야? 갑자기 나도 좀 아줌마가 되고 싶은데.. 같은 생각도 몇 번 했다. 그래서 때로는 요가보다 찻자리가 더 기다려졌다. 새벽수련 전날 밤이면 찻자리에서 꺼낼 얘기들을 마음에 품고서, 꼭꼭 일어나야 한다고(말하러 가야 한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음식을 나눈다는 건, 서로의 이름과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이자, 이름 모를 타인과 도반으로 맺어지는 일이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찻자리 덕분에, 요가원은 운동하는 공간을 넘어 동네 사랑방이자 지역의 커뮤니티 같은 공간이 됐다. 요가라는 공통의 관심사에 한동네 주민이라는 친근감이 더해지면서 도반들은 끈끈하게 이어졌다. 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신체의 어느 부위가 약한지, 최근엔 어떤 사건사고가 있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몸과 마음을 더 잘 알게 됐고, 수련 과정에서 겪는 고충들도 이해하게 됐다.


무엇보다 도반이 생긴다는 것은 내 수련를 응원해주는 동지들이 생긴다는 뜻이다. 휴직을 끝내고 복귀한 직장이 너무 바빠서 새벽 요가에 빠지는 일이 많아졌다. 찻자리는 고사하고 수련이라도 지키고 싶었는데, 야근 아니면 회식인 저녁이 이어지면서 나는 출근조차 겨우 해내고 있었다. 이런 내가 너무 한심하고 나약하게 느껴질 때면, “왜 이렇게 안 와~ 보고싶네!”하는 은근하고 고마운 질책부터 “많이 바쁘죠? 그래도 잘 하고 있던데요. 힘내요!”같은 격려의 말을 건네는 도반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기다리는 도반들을 위해서라도 수련에 나가고 싶어졌다. 나와의 약속보다는 남과의 약속이 좀 더 지키기 쉬운 법이니까.


수련이 끝나고 나면 다 귀찮고, 쉬고 싶고, 혼자 있고 싶을 법도 한데 선생님이 끝끝내 "차 한잔씩 하고 가요"라며 도반들을 모아 찻자리를 벌였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느 도반의 몫으로 펼쳐져 있는 매트가 수업 시작 시간까지 채워지지 않을 때의 그 아쉬움과 서운함을 안다. 어제 많이 피곤했나? 과음을 했나? 염려도 든다. 그건 모두, 함께 차를 마신 사이라서 드는 마음들이다.


몇 번이고 우려낸 찻물처럼 찐해져버린 도반들을 떠올린다. 이번주는 꼭, 만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즌2] ep 3. 평생 단 하나의 운동을 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