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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재형 Oct 08. 2020

프롤로그

피아노 치며 생각한 것들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인간은 외롭지 않다.”


-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중 -








프롤로그



 극도로 긴장하면 멍해지는 것일까. 100명 넘는 관객이 날 기다리고 있는데 졸음이 몰려온다. 혼자 있기에는 너무 큰 대기실에 섬처럼 앉아 마른 세수를 했다. 뺨을 후려갈겼다. 콩콩 점프를 뛰었다. 허겁지겁 생수를 부어 눈가에 적셨다. 정신 차리자. 내가 혹시 준비가 부족했을까? 공연 직전 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간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어릴 때 그 흔한 피아노 콩쿠르 한 번 나가보기는커녕 성인이 되어서야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겨우 익힌 내가 서른이 훌쩍 넘어 독주회라니. 예기치 못한 순간에 상상은 현실로 불쑥 찾아오곤 한다. 영원히 작업실 창고에서 꺼낼 일 없을 것 같은 그림들도 일단 그려놓기만 하면 언젠가는 전시를 꼭 하게 되었던 것처럼. 하드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다시는 재생될 일 없을 것 같은 영화도 결국 사람들 앞에서 상영하게 되었던 것처럼.


 몇 해 전 영화 상영을 마치고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에게 받은 질문이 생각난다.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감독님은.. 그러니까 감독님은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에요?” 이마에 펜던트를 달고 인터뷰하는 정체 모를 히피, 야밤에 산속을 뛰어다니는 외계인이 출연하는 등 혼란스러운 영화를 보고 심정이 꽤 복잡하셨으리라. 도대체 나는 누군가. 뭐라고 말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답하기 전 상당히 머뭇거렸던 기억만 있다. 얼마 전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라는 귀여운 시집을 읽고 난 후 똑같이 질문이 돌아온다면 이렇게 답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요즘에는 피아니스트요. 


 나는 뒤늦게 피아노를 사랑하게 되었다. 겸손이 아니라 정말 못 친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는 호칭조차 버거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동네 성인 취미 피아노 수준이다. 그러나 이제는 엄연한 인생의 일부가 되었고 심지어 직업의 일부가 되었다. 피아노를 빼놓고는 내 소개를 할 수 없다. 서투른 내 피아노도 연주할 기회가 생기고, 이렇게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가득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어떤 영화 혹은 만화책에서 본 낯간지러운 대사가 갑자기 떠오른다. "네가 피아노를 계속 친다면 반드시 들어줄 사람이 있을 거야." 진짜로 그렇게 되었다. 30대에 찾아온 이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쓴다. 이 책은 피아노에 관한 에세이다. 나처럼 뒤늦게 뭘 시작한 사람의 이야기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쓰고 있는 ‘뒤늦게’라는 단어에 관한 항의서이다. 뭘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 알맞은 시기가 있고, 또 그것을 직업으로 택하기에는 일정한 경로가 정해져 있다는 ‘생애주기 이데올로기 사회’에 균열을 내고 싶은 나의 소심한 욕망이다. 또 이 책은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경계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시선으로 피아노를 핑계 삼아 예술 전반에 관한 생각을 풀어내는, 창작자로서의 작가노트가 될 것이다.   


 대기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공연 입장을 알리러 나를 데리러 오는 스텝이겠지.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긴장과 공포와 불안과 초조의 최대 총량이 이런 것이었던가. 쫄지 말자. 쫄지 말자. 아, 쫄린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스려본다. 죽음을 방불케 하는 공황장애 증상도 결국 이겨냈던 나 아닌가. 이 순간부터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있다. 그 곡은 도입부에 건반을 어떻게 눌렀더라? 손가락 번호가 중지에서 엄지였던가? 따위의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생각은 금물이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머리를 열고 좌뇌를 꺼내 책상 밑에 두었다. 이제 오로지 몸과 감각에 맡겨야 한다. 똑똑똑.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내 이름을 건 최초의 단독공연 무대다. 혼미한 정신으로 공연장에 들어갔다. 조명이 비치는 스타인웨이 풀사이즈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섰다. 꽉 찬 객석, 묵직한 침묵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마이크를 들었다. 어쩌면 연주보다도 더 하고 싶었을 멘트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냅다 뱉었다. 약간은 뻔뻔하게.


"안녕하세요. 저는 피아니스트 오재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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