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재형 Jan 27. 2021

여기까지 가져온 피아노뿐

피아노 치며 생각한 것들


작은 병원에서 의사는 뒷정리를 하고 있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린다. 이미 퇴근이 훌쩍 넘어선 늦은 시각이라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음날 의사는 한 소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또 그 소녀가 어젯밤 초인종의 주인공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의사는 소녀의 사진을 휴대폰에 담는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소녀의 정체와 사망 원인을 추적해나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는 사람들의 협박과 무관심, 그만 좀 하라는 경찰의 충고까지 무시하고 심지어 의사 커리어에서 진급의 기회까지 포기하며 소녀의 진상 규명에 매달린다. 의사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지만 오로지 행동으로 집요함을 보여준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의사에게 아무도 소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의사는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가질 법한 얕은 죄책감 너머의 책임감을 스스로 부여하고, 결국 진상 규명에 성공한다. 다르덴 형제가 만든 영화 <언노운 걸>의 스토리다.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이어지는 무심한 도시의 엠비언스 사운드는 어떤 배경 음악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현실로 이어지는 통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극장을 빠져나와도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살면서 내 귀에도 가끔 초인종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올 때가 있다. 초인종을 누른 '언노운 걸'은 (강남역 살인사건처럼)한 명, 때로는 (세월호처럼)수백 명이기도 하다. 명백한 부조리, 가해자들의 천국, 사회의 야만성을 마주하며 좌절한다. <언노운 걸>의 의사였다면 좌절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범위에서 사건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존경스럽다. 나는 어떤가. 현장을 방문하고 집회에 몇 번 참여한 경험은 있다. 그러나 이제 들끓는 분노를 해소하고자 현장에 달려가는 사람은 아니게 되었다. 반복적 참상을 목격할수록 분노의 농도는 떨어지기 마련('세상은 원래 이래')일까? 그 이유뿐만은 아니다. 결국 내면에서 '당사자'와 '나'를 구분하게 된다. 내 일상이 침범되지 않는 선에서만 있으려는 나의 태도는 '그들'과 끝까지 갈 수 없게 만든다. 어차피 이슈가 지나면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텐데, 괜한 설레발 치지 말자고 생각한다. 이럴 때면 내 감정을 대변해 주는 노래를 찾아 듣는다. 캐비넷 싱얼롱즈의 <여기까지 가져온 노래뿐>


물론 누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죠 / 그걸 알면서도 지금 이렇게 길 위에 /

물론 누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죠 / 그걸 알면서도 생각하죠 /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 머리 위로 물든 하늘 /

내가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는 건 / 여기까지 가져온 노래뿐


나는 이 노래를 강제 철거될 위기에 놓인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결국 사람들은 쫓겨났고 마을은 사라졌다)에서 라이브로 처음 들었다. 노래는 아름다웠다. 폐허로 변해가는 그 좁은 골목, 노란 불빛 아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같이 노래를 듣던 그 풍경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또한 가사를 들으며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느껴도 될지 모르는 위안도 챙겼다. 여기까지 가져온 노래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도 별 볼 일은 없지만 들려줄 게 있다. 좁은 방에서 연습한 피아노라도 괜찮다면 말이다. 한 해에 고작 두세 번 작은 무대에 서는 것이 전부이지만 나는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은 일들과 기억해야 할 일들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 매년 연주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그럴 리 없다. 이 연주 행위의 효용과 쓸모를 그려본 일조차 없다. '그걸 알면서도' 하게 된다. 사회적 부조리를 내 문제로 여기는 시민의식 때문이지 아니면 작가로서 나의 입신양명을 우선에 둔 것인지 가끔 분간이 되지 않아 괴롭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이른바 '직접 행동'으로 끝까지 연대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돌리겠지만 피아노 치는 일 하나만큼은 끝까지 할 자신이 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연주하고 상영할 계획이다. 여기까지 가져온 것이 피아노뿐이겠지만.




https://youtu.be/rLcPCuOQKfE

작가의 이전글 나는 피아노에 싹수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