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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재형 Aug 14. 2021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

1인분 예술에 관하여

어찌다보니 영화감독이 되었고 몇 년째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간 여러 작업을 시도하면서 희미하게 이어져온 생각들을 글로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 보급형 영상 장비와 소프트웨어가 상향평준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화는 협업과 자본의 산물이다. 아무리 소규모 독립영화라고 해도 몇 천만원이 그냥 깨지는 이 작업은 제작지원이 절실하다. 한 개인이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인들은 때맞춰 돌아오는 각종 제작지원 일정을 체크한다. 그러나 지원금 사냥꾼이 되는 일은 고단하기만 하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지원서를 작성하고, 피칭을 하고, 지원금 주체를 설득하기 위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화 트레일러를 10가지 버전으로 가지고 있는 작업자들이 내 주변에도 흔하다. 물론 영화계 사정만 이렇지는 않다. 


미술도 그렇고 모든 예술계가 이른바 제작지원의 시대다. 이 ‘제작지원 시대’는 예술 씬에 커다란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지원 이력은 곧 발표 기회로 이어진다. 그저 오로지 돈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제작지원은 예술계의 시스템이 되었다. 제작지원 받은 영화는 다음 년도 영화제에서 상영을 약속받고, 갤러리 대관은 문화재단 지원금을 ‘물고 온’ 작가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지원해주는 곳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 라고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어쩐지 볼수록 괴상한 풍경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도 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기민하지 못해 제작지원이라는 이 강력한 흐름과 물결에서 소외되는 창작자들, 그리고 그럴듯한 작업 계획서를 작성해서 타인에게 어필하는 일에 특히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지원’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단어 뒤편에는 이렇게 알려지지 않는 사실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흐름을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끝없는 지원서 작성과 피칭 노동을 언젠가부터 시도조차 거부하기로 한 사람들, 바늘구멍 같은 제작지원에 쏟아내는 노동력이 너무 아까워 차라리 그 시간에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 자본과 규모를 최적화시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1인분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나 같은 사람들도 어딘가에 또 있지 않을까.  


나는 최근 장편 다큐멘터리 하나를 완성했다. 근 몇 년 간 내 모든 역량을 쏟아내어 즐겁게 만들었다. 제작 지원은 1원도 받지 않았다. 그 어느 곳도 지원하지 않았다. 필수로 맡겨야 하는 작업(번역, 감수, DCP제작)은 맡겨야 했지만 나머지 작업, 그러니까 전문가에게 맡기면 퀄리티가 좋아질 영화의 후반 작업들(색보정 오디오 믹싱 등)은 그냥 내가 다 했다. 배리어프리 작업까지. 당연히 맡기는 것보다 퀄은 떨어지고 시간은 훨씬 더 든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존나 짱이고 잘해서가 아니다. 나는 단지 제작지원이라는 예술계 시스템에 맞지 않는 사람일 뿐이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1인분의 예술론’을 최대한 사수해보기 위해서다. 보통 영화감독이 B캠으로도 쓰지 않는 카메라로 나는 여전히 작품을 만들고, 웬만한 촬영은 모두 내 조그만 방 안에서 홀로 진행했다. 나는 '제작진'이라고 불릴만한 규모를 가져본 일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작업 규모를 줄이는 1인분 예술’은 돈 없는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게(!) 명시하고 싶다. 그것은 돈 만큼이나 성격과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딘가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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