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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 시 Sep 17. 2015

플레이 리스트 #1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by. 브로콜리 너마저



  "써."
  남자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다시 자신의 녹차라떼에 빨대를 꼽는다. 무슨 맛으로 먹냐 그녀가 물으면 '고소한 맛'이라 말한다. 그녀는 믿지 못한다. 그저 남자가 커피를 마시는 어른인 척하는 아이정도라 생각한다.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모른다.

  그 날은 유난히 심술이 났다. 남자는 두시간째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 주기를 바란다. 적어도 남자가 보낸 메시지가 그녀의 모임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기를 바랐다. 메시지가 그의 심술을 온전히 그녀에게 전달했으면 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남자는 기다리기를 포기한다.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그녀는 빛이 난다.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항상 상대의 말에 고개 끄덕여준다. 눈을 바라봐 주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가 여기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계속하렴'이라 온몸으로 말한다. 남자는 그녀의 그런 점이 좋았다. 하지만 심술이 난 남자는 비뚤어진 생각을 한다. '왜 다른 사람에게도 저렇게 하고 있을까', '나였더라면 당신이 보고싶어 그 모임을 제쳐두고 당신을 만났을 거야', '나는 더이상 그녀의 우선순위가 아니야'라고. 남자는 불현듯 화가 난다.

  그녀는 남자가 왜 화가 났는지 안다.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도 안다. 그리고 잘 풀어주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의심했다는 것에 오히려 자신에게 화가 더 난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고 그만큼 잘안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다. 남자는 그녀를 닮을 수 없다. 우린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먼저 잡아주지만 그녀는 아니다.
  남자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남자는 낭만과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남자는 브로콜리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남자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섭섭해."
  남자의 말에 그녀가 말한다. 남자는 그녀의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화를 낼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화가 났다.  하지만 예상과는 약간 다르다. 금방 화를 가라 앉히고 남자를 집에 보낸다, 오늘만 연락하지 말자면서. 남자는 돌아가는 길에 생각한다.  남자가 느낀 바를 그녀에게 그대로 전한 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이내 아차 싶다.

  그녀는 남자가 손잡아 주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들을 싫어하지만은 않는다.
  그녀는 낭만과 이상을 추구하는 남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브로콜리를 싫어하지만은 않는다.
  그녀는 ···.

  남자는 지난 밤의 일 때문에 그녀 앞에서 선뜻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를 잘 안다. 그리고 어떤 표정 지을지도 마음을 정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그녀와 자신이 다름을 느낀다. 하지만 이번엔 화가 나지 않는다. 다만 앞에 놓인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그녀가 한 모금 마셔주길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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