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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 시 Oct 14. 2015

플레이 리스트 #2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by. 김광석

  나의 오후는 나른한 주황색이었다. 


  날이 춥지만 않으면, 중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책방을 들러 판타지 소설책을 빌려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아파트 안의 정자에 엎드려 책을 읽곤 했다. 물론, 나도 친구들과 함께 PC방을 같이 가거나 집에서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전자는 부모님의 반대로, 후자는 구닥다리 컴퓨터 덕분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임 안의 판타지를 책으로나마 해소하고자 시작된 취미인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 자체로서 재미있는 일이 되었다. 

 

  부모님은 게임보다는 책을 가까이하게 된 아들을 보며 기뻐하셨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나만의 취미가 너무 좋았다. 특히, 아직 쌀쌀하지 않은 그런 늦여름에서 초가을의 맑은 날에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았다. 적당히 시원한 바닥에 배를 깔고 저무는 해가 던지는 뜨뜻한 햇살을 등에 덮으면 사실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 기분 좋은 오후는 계속되지 못했다.


  중국으로 발령이 난 아버지 때문에 온 가족이 중국 쓰촨 청뚜로 이사를 갔다. 아직 학기를 시작하지 않아 며칠을 학교에 가지 않고 놀 수 있었다. 그곳은 전에 살던 곳과는 달랐다. 비록 중국어로 된 책뿐이었지만 엄청 큰 책방도 있었고, 아파트 안에 훨씬 좋은 정원과 벤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기분 좋은 오후의 주황색 하늘은 없었다. 아침에는 항상 뿌연 안개가 짙게 꼈고 오후엔 그 안개가 다 그대로 올라가는지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정말 혼자 밖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온전치 못할 것 같은 하늘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우중충한 날씨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스스로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학교 첫날에도 우울한 하늘이었다. 최악이었다. 심지어 더 최악이었던 것은, 아무리 한국 사람이 많은 국제학교라지만,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 하고나 막 친해질 수 있는 사교성이 나에게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지호라는 녀석이 나타났다.


  “에요, 형 게임해?”


  처음엔 필리핀 사람인 줄 알았다. 힘없는 장발을 아무렇게 기르고, 검게 다 타 버린 까만 얼굴엔 항상 장난스러운 웃음이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얼굴만큼이나 격이 없었고 처음 만난 날 우리 집에 작은 휴대용 게임기를 들고 와 밤새 같이 게임을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계속 학교 끝나고 같이 게임을 했다. 흐린 하늘은 게임하기에 적격이었다. 오히려 해가 뜨고 맑은 날이면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게임기의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게임기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나 끈적거렸다.


  매일 그와 게임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 학교에 친구가 많았고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나도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즐거웠다. 더 이상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항상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그곳의 잿빛 하늘도 싫지 않았다.


  3년 후에 대학 입시를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불행히도 청뚜에서의 친구들은 뿔뿔이 미국과 중국으로 흩어졌고 그나마 한국으로 같이 들어온 친구들도 다른 지역으로 멀어져버렸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아직까지 연락하던 한 명의 중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내가 조금 달라졌다고 말한다. 조금 더 둥글둥글해졌다나. 


  예전처럼 밖에서 책을 읽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따듯한 오후에 햇살을 즐기는 것은 좋았다. 그리고 가끔 날이 흐려 일광욕을 하지 못할 때면 흐린 하늘을 보며 잿빛 구름을 보며  그때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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