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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Mar 10. 2024

(24) 숭고미학: 예술로 만나는 경이로움의 세계

[색채 너머로(Beyond the Colors)] (24) 숭고미학: 예술로 만나는 경이로움의 세계


숭고미학은 말 그대로 '숭고함'을 다루는 미학이다. 그런데 이 '숭고함'이란 단순히 '아름다움'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숭고는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어떤 것, 이성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경이로운 무언가를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마치 망망대해 앞에 선 듯한 압도감,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느끼는 경외감 같은 것 말이다. 18세기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와 임마누엘 칸트가 이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립했고, 예술가들은 이를 캔버스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숭고미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르는 아마도 풍경화일 것이다. 거대한 산맥, 끝없이 펼쳐진 평원, 먹구름 몰려오는 하늘 등 자연의 장엄함을 마주할 때, 우리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과 겸손함을 느낀다. 영국의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터너는 자연의 거대한 힘을 묘사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그림 속 자연은 인간을 압도하는 숭고 그 자체다.


하지만 숭고는 꼭 거대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0세기 추상표현주의자들은 형태 없는 색면으로 숭고를 표현했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화를 보면, 마치 우주의 깊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이를 두고 "숭고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평했다. 추상미술은 형상 너머의 존재, 무한과 영원을 향한 갈망을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도 숭고미학의 전통은 오래되었다. 중국의 산수화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 그 속에서 느끼는 심오한 정신세계를 그려낸다. 거대한 산과 작은 인간을 대비시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겸허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조선의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웅장한 풍광을 진경산수화로 그려내며, 자연을 통해 도를 깨우치고자 했다. 그에게 숭고한 자연은 곧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늘날 숭고미학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미디어 아트는 기술을 통해 감각을 확장시키며 새로운 차원의 숭고를 경험하게 한다. 제임스 터렐의 빛의 설치미술은 우리를 무한한 공간으로 이끈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의 대지미술은 광활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장관을 선사한다. 빌 바이올라의 비디오 아트는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의 경계에서 느끼는 숭고를 탐구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몇 가지를 더하자면, 칸트는 숭고를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나누기도 했다. 수학적 숭고는 크기의 절대성 때문에 느끼는 숭고이고, 역학적 숭고는 자연의 무한한 힘 앞에서 느끼는 숭고다. 또한 칸트는 숭고가 두려움이 아닌 쾌감을 동반한다고 보았는데, 우리가 그 거대함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우월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마크 로스코는 극도로 근시였는데, 어쩌면 그의 그림 속 아득한 공간감은 흐릿한 시야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숭고미학은 예술을 통해 우리를 일상을 초월하는 경험으로 이끈다. 숭고를 마주할 때, 우리의 영혼은 흔들리고 확장된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유한성을 깨닫지만, 동시에 무한을 향해 열려있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도 발견한다. 예술은 이 경이로운 순간을 포착하여, 우리에게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볼 기회를 선사한다. 숭고의 미학은 예술이 지닌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이며,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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