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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미 Sep 02. 2021

8월의 대화: 나의 본질, 정체성, 고통의 신호

우리는 초코볼을 뇸뇸뇸 씹어 먹으며 꽤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며칠 전에 만난 수근 오빠가 <숨결이 바람될 때> 책 속의 한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뇌 수술을 앞둔 환자가 수술 후 시각과 미각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듯 낙심했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그 환자는 슈퍼볼 기간이면 아이스크림 한 통을 끼고 앉아 TV를 시청하는 게 삶의 큰 낙이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한 스토리와 맥락을 확인하고 싶은데 책을 처음부터 다시 훑어봐도 찾진 못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영화 <스틸 앨리스>를 떠올렸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게 되는데,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상태가 되돌아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 영상을 본다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라’는 메시지를 녹화하는 장면이 있다. 오빠가 얘기한 책 속의 그 환자에게 슈퍼볼과 아이스크림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요소’ (즉, 없으면 아쉽지만 살아가는 데는 지장 없는 요소)일 뿐이지만, 앨리스에게 기억과 지성이라는 것은 그녀의 ‘본질이자 정체성’(그것 없이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느낄만한 요소)과도 같지 않았을까요? 라고 했다. (잠시 후 생각을 바꾸긴 했다. 앞서 말한 책 속의 환자에겐 즐거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는 일이 곧 자신의 본질이자 정체성일지도 모르니까.)
 

ⓒ 영화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한편, 내가 해석한 앨리스의 공포에는 분명히 나의 개인적 공포가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본질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 내 존재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공포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오빠는 다시 노무현 전대통령의 유서로 얘기를 이어갔다. 유서를 보며 그의 마지막 순간은 ‘책을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구나 느꼈다고 했다. (정확한 유서의 문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였다.) 그러면서 나에겐 내가 이토록 고통스럽구나 하는 것을 알아채는 신호가 있냐고 물었다.
 
 난 사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그 문구에서도 글쓴이가 극도로 고통스러웠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에 더 놀랐다. 아마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요소, 또는 삶의 본질, 정체성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오빠는 어떤 상황일 것 같냐고 물어봤더니 좀 더 생각해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가 그 신호일 것 같다고 답했다. 과거에 번아웃을 겪었던 시기에, TV 속에서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 속보가 나오고 건물과 사람들이 휩쓸려 가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마음이 돌맹이처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곤 다시 고쳐 말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원래 정신적 에너지가 남아있어야만 가능한 고차원적인 능력이니까요… 좀 더 본능적인 종류의 희열마저 잃는다면 어떨까 상상하며 다시 말했다. “해가 지는 풍경에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때요.” 그건 내가 아주 고통스럽다는 신호일 거예요. 


다행히 살면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상만 해도 엄청나게 무섭고 슬픈 신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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