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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섭 Sep 22. 2015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인도 오로빌의 나무 심는 공동체 '사다나 포레스트'에서의 한 달

    바람은 원래 부는 것이고 

    

인도 오로빌의 나무 심는 공동체 '사다나 포레스트'에서의 생활 여드레째. 생에 가장 행복했던 한주였다! 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최악도 아니다.

기온은 40도, 습도는 100퍼센트로 수렴하는 끈적끈적한 날씨와 모기떼의 습격이 견디기 힘들 정도였고, 각자의 에고(ego)가 매우 강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썩 쉽지 않았다. 환경친화적이지만 위생친화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비료 화장실과 펌프로 물을 올리고 한참을 낑낑거리고 옮겨 샤워와 빨래를 하는 생활은 적지 않게 불편했지만 그런 건 적응의 문제일 뿐이니 일주일이면 됐다.

태어날 때부터 왼손으로 뒤를 닦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휴지가 없어 화장실에 못 가겠다 불평하진 않는다.     

동물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비건 식단은 맛이나 영양 측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한두 달 즈음 체험의 측면에서 그리 나쁘지만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것이 본인의 입과 몸에 나쁘지 않다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일 것이다.


하루 5시간의 일거리는 주임무인 나무 심기뿐만 아니라 봉사자들로만 이루어진 커뮤니티라는 특성상 가사잡일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화장실을 비롯한 이런저런 시설의 청소 및 보존이나 요리, 주방 잡일 등 어디에서나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며 뜨겁디뜨거운 낮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섯 시에 시작되는 일과는 아침 식사 전 두 시간 반, 점심식사 전 두 시간 반의 세바(seva, 산스크리트어로 '봉사'라는 뜻)를 하면 끝이 난다.

이런저런 국가의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다. 인류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임의의 어느 두 사람 사이에서도 어떤 공통점을 찾기 힘든 사람들의 집합이며,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괜찮은 사람 조금과 안 괜찮은 사람 조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소 권장 체류 기간인 한 달을 채우기 위해선 봉사와 수양과 극기가 버무려진 이 생활을 삼 주 가량 더 해야 하는데, 가끔은 즐거운 시간이 되겠고 가끔은 그저 시간을 버텨내는 시간이 되기도 하겠다. 당연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자꾸 내뱉고 하다 보면, 때로는 즐기고 때로는 버티고 때로는 올라가고 때로는 내려오고 하는 데서 오는 에너지 소모가 덜해지리라.  


원래 그런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바람은 원래 부는 것이고 나도 원래 존재하는 거니까. 그냥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둘리면 되는 것, 그렇게 감각을 활짝 열어두고 한 개 두 개 마음 편히 쉽게, 쉽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 모르는 걸 배우고 아는 것도 또 배우고.

 

사다나 포레스트의 그런 한주였다. 많이 배우는 한주. 내가 물을 먹인 아기 나무도, 물을 준 나 자신도, 야금야금 알게 모르게 자라났을 한주였다.

그리고 무진장 더웠다. 내일은 더 더워질 것이라는 소식이다.



    

    달님이 땅 끝에서 이마까지 올라오는 동안  

   

이곳엔 날것 그대로의 생, 생생(生生)이 있다. 그러나 생생 우동이나 생생 떡볶이는 없다. 구운 음식도 튀긴 음식도 없다. 육류와 유제품뿐만 아니라 과다 공정을 거친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먹을 게 없다. 이곳엔 메이크업을 하는 여자도 수트업을 하는 남자도 없다. 정글짐이다. 세탁기도 샤워기도 없다. 생각해보니 여긴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게 없다.

전깃불이 없는 이곳에선 해가 지고 나면 마더 파더 못 알아볼 만치 어두운데, 요 며칠 달님이 비상식적으로 밝다. 그래서 초저녁 개와 늑대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눈앞이 캄캄하다가 밤이 깊어지면서 서서히 세상이 밝아진다. 저 노란 달이 검은색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만든다. 전기가 없어도 밤 열 시가 대낮처럼 밝을 수 있다니, 이건 뉴스보다 시에 가깝다.

달빛의 간섭에 멀찌감치 떨어져 초롱초롱거리는 일백여 별들도 뭔가 도우려 하는 듯하지만 그다지 일손이 되는 것 같진 않다.      

반면, 달은 밝아도 열을 내진 않는다. 사막과 같은 곳이라 땅이 낮의 태양열을 제대로 저장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달빛이 차갑다" 했다. 양말을 신었다.

내일 낮이 되면 보나 마나 푹푹 쪄 속잠방이만 입어도 더워서 정원에 물을 주다 호수의 방향을 틀어 등목을 할 계획이다. 태양은 밝기도 엄청나게 밝은 데 뜨겁기도 엄청 뜨겁다. 그러니 태양신을 믿어야지. 푼챠오라 이름 붙여야겠다.

      

귀뚜라미와 개구리와 강아지와 부엉이와 또 몇 종의 이름 모를 새가 바람의 박자를 좇아 노래를 부르고 나는 나무 아래 해먹에 누운 밤이다. 모기들에게 밥을 주며 검은색 나뭇가지 사이로 노란 달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밤이다. 지구 방방곡곡의 Dreamer들이 모여 “I'm not the only one”이라 외치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고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세상에 왜 이런 세상을 꿈꾸느냐며 타협점을 찾는 중이다. 문득 과대 공정과 과잉 포장에 급속 냉동까지 거친 내 삶이 보고 싶은 밤이다. “그러고 보니 내 삶 어디다 뒀지?” 하는 기분에 괜스레 배낭 주머니,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이상한 날이다. 달이 하도 커서 저기에 두었나 싶은 이상한 달이다. 다 흩어져 버린 걸 한데 모으려면 고생 좀 하겠다 싶은 이상한 이야기. 달님이 저 땅 끝에서 내 이마까지 올라오는 동안 아무것도 못 찾은 허기진 밤. 대상 없는 그리움이다.


연두색 크레파스로 달을 칠하기로 했다. 안녕.



    

    몇 줄의 시가 될 수 있을지도

     

달님은 작아지고 별들이 많아졌다. 달님은 밤에 눈을 감고 웃는 입을 하고 꿀잠을 자는데 별들은 밤새 초롱초롱 깨어있다. 그래서 어젯밤엔 나도 잠을 잘 못 잤지.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니 그런대로 보통은 잔 것 같았다.


수십 개월째 밤이면 밤마다 몸뚱이를 누이는 세계 곳곳에서 유행 중인 허리가 너무 많이 푹 들어간 스프링리스 매트리스들은 내 수명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듯하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은 왜 아직도 모를까. 아침에 허리를 두들기며 눈을 떴을 때 나는 근수를 잠시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근수는 숙면을 취

하기 위해 매일 밤 베개 옆에 에이스 과자를 한 봉지 두고 자곤 하던 내 오랜 친구다. 아침이면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며,

"에이스에서 주무셨어요?"라고 물어 준다나 뭐라나.

 

매일 아침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눈을 뜨는 날들이 늘 엄청 쉬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무언가도 아닌 것 같다. 근원적 고독 같은 것이라 해두어야겠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그래서 '근원적'이라 했다.

나중 어느 날 아침 서울의 내 방 폭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생의 한 시절을 보낸 얼음 사막의 밤들과 그물침대의 잠들을 그리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맥락에서 살아간다 하는 일은 살아 있다 하는 일보다는 조금 난해한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 살아 있는 일은 많이 즐겁고, 살아가는 일은 조금 버겁다.

우리는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요일엔 나무를 심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일요일엔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나무를 심지 않는다는 논리인 것 같은데. 이런 걸 생각하면 정말, 하나님 최고.


하지만 일요일에도 입에 풀칠은 해야 하기에 아궁이에 불은 지펴야 하고 당근과 토마토는 썰어야 한다. 일요일이라고 사막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진 않기에 아기 나무들에 물도 주어야 한다. 일요일이라고 사람들이 똥을 참진 않으므로 비료 화장실의 똥도 부지런히 저어 주어야 한다.


이곳에선 똥을 비료로 사용하기에 똥과 오줌을 분리해서 싸는데 거대한 똥통에 똥이 어느 정도 쌓이면 내 키보다 커다란 나무 막대로 똥통을 저어 똥산의 해발고도를 낮춰준다. 그래도 여전히 너무 높다 싶으면 똥삽으로 똥을 퍼 비료 대기실로 옮긴다. 이 똥은 육 개월 정도 지나서 나무를 심을 때 비료로 사용하는데 그땐 이 똥을 손으로 마구 만지작거리면서도 아무도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정말 신기한 게 이런 거다.

      

이 똥 작업은 이 바닥에서도 3D 업으로 통한다. 지난주에는 내가 똥반장이었고 이번 주의 똥반장은 하이나다. 내가 우아하게 물 주전자로 화단에 물을 주고 있으면 하이나가 화장실에서 똥을 씹은 표정을 하며 나오는데, 알게 모르게 똥을 조금은 씹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다.


하이나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베를린 사람으로 올해부터 베를린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게 되는 선생님인데, 학기가 시작되기 전 시간과 돈에 여유가 있어 인도를 여행하다가 운명처럼 재앙처럼 나를 만났다. 하이나가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일부터 이 주간 인도 대륙의 남쪽 끝에 있는 마을로 내려가 북쪽을 향해 야금야금 올라오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좋은 여행이 될 것이다.

하이나와 고물 자전거 두 대를 질질 끌고 읍내로 나갔다. 이런 오래된 자전거의 바퀴가 아직도 굴러가는 걸 보면 동그라미 바퀴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얼마 전 오로빌의 마티르만디르라는 이름의 해괴한 구조물 안에서 처음으로 명상에 공식적으로 성공했다. 명상에 성공 실패가 있다는 게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난생 처음으로 내부 세계의 무언가를 구경했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한 경험이었다.

알고 보니 명상은 코끼리처럼 크고 무거운 이빨을 만나는 일이었다. 사실 이 이빨은 전에도 두 번쯤 만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불면증에 시달릴 때 깊은 밤의 어느 시점에서였던 것 같고 또 한 번은 언제였는지 어디서였는지 모르겠다.

코끼리처럼 크고 무거운 이빨이 하나 갑자기 머릿속 어딘가에 등장해 서서히 움직이며 내 몸의 어떤 부분을 꾹 누르는……. 마티르만디르 명상에서는 그 이빨이 나타나서 내 몸속에 상당히 오래 머물렀는데, 그것이 나를 누르는 기분이 정말 맑고 상쾌해서 나는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짜이와 사모사로 똥 씹은 입을 헹구고 탈리를 한 접씩 먹고 동네의 하누만 신을 모시는 사원에 갔다. 우리는 하누만 신을 모르지만 사원 뒤편의 대리석 그늘이 좋아 그곳에서 종종 시간을 보내곤 한다. 운이 좋게도 가방에 <말테의 수기>가 들어 있어서 몇 장 읽었다. 굉장한 구절을 발견했는데 벌써 까먹었다.


시는 감정의 소산이 아니고 경험의 결과물이다. (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잊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올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나중에, 아주 나중에 몇 줄의 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다. 뭐 이런 맥락의 구절이었던 것 같다.     


옆을 보니 하이나가 이미 명상에 들어가 있다. 명상하는 사람 옆에서 집중이 잘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나도 가부좌를 트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계속 치즈 떡볶이 생각이  날뿐 코끼리처럼 크고 무거운 이빨이 나타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언젠간 다시 나타날 거라 생각한다. 어서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그게 무엇이라면 내가 멀리멀리 돌아다니며 찾아다니던 그것과 곧 대화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저곳을 헤매며 그것을 찾는 동안 내 안에선 코끼리처럼 크고 무거운 하얀 이빨이 자라고 있었다. 다시 만나면 코끼리처럼 크고 무거운 하얀 이빨에게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줘야겠다. '코끼리처럼 크고 무거운 하얀 이빨'은 너무 길다.

 



     Epilogue ;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일년이 흘렀고,

사다나 포레스트에서 사막에 나무를 심으며 한세월을 함께 보냈던 피터 라주가 지난밤 하늘나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혼이 아름다웠던 그를 그리며 보낸 지난밤은 길었다.

      

늦은 아침 눈을 떴을 때 침대 머리맡에 놓인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위에 아주 작고 하얀 나비가 앉아 있었다. 나비는 방안을 나비처럼 조용히 날아다녔고 책상 책꽂이 침대에 잠깐씩 머무르기도 했다.      


방이 답답하지 않을까 싶어 방문으로 부채질을 해줘도 나가지 않고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보여줘도 나가지 않는다.     


“너는 왜 이곳에 왔니?” 물으려다,


“그러는 넌?”

하고 되물음을 당하게 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질 것만 같아,


입을 닫고 창을 닫고 하얀 나비를 편안히 쉬게 해주었다.

 

창밖에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데 나비는 쌔근쌔근 잘도 잔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이미 고인이 된 가수가 노래를 시작하는데,

     

“그대 잘 가라.”

하며 노래는 맥도 없이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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