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그렇지만 위대한.
KBS의 'TV쇼 진품 명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나, 혹은 골동품 시장에서 매입했었던 귀해 보이는 옛 물품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조상들의 지혜, 혹은 숨겨진 유물과 보물들에 대해서 찾아내는 기획으로 유명세를 탄 프로그램으로 지금도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대표적인 KBS1의 효자 상품이다.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수줍게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보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 가치에 대해서 기대하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출연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고가의 가치에 환호하기도 하고, 가품이라는 말에 충격과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특히 구입한 물건보다 가보라고 전해 내려오는 물건의 가치일수록 그 진지함은 더하다.
가보의 사전적 의미는 " 한 집안에서 대를 물려 전해 오거나 전해질 보배로운 물건 "이다. 필자의 집에도 대를 물려 전해 내려오는 물건은 아니지만, 전해질 보배로운 물건이 하나 있는데, 이번 기회에 소개를 해드릴까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물건을 보면서 항상 마음을 다잡고 항상 볼 때마다 엄청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진짜 보물과 같은 물건이다.
자 그럼 우리 집 가보를 소개합니다!
짜자잔.
바로 이것이다. 친숙한 청테이프로 겉이 감겨져 있고, 갈색의 표지로 된 물건 언뜻 봐서는 책으로 보인다.
자그럼 앞으로 가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집안에서 가장 오래된 앤틱 가구 위에다가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분명 책이다. 상당히 오래된 책으로 보인다. 대항해시대 시절 보물선에서 발견된 보물지도가 그려진 책일 것 같기도 하고, 중세시대나 근대시대에 출판된 전문서적 같은 느낌일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이책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그럼 정답을 공개하도록 하고 이게 왜 우리 집 가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정답은 바로 사전이었다.
이 책은 1980년대 초에 출간한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영한 사전이다. 이제 겨우 30년이 막 지난 책이다.
사실 이 책은 필자의 할아버지가 영어공부를 하시는 목적으로 구입하셔서 소천하시기 전까지 쓰셨던 책이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나름 당대의 엘리트 셨다고 한다. 국비유학도 다녀오시고 나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전파공학 기술자 셨다. 필자가 가족 소개에서 밝혔듯이 필자의 아버지는 S대 의대를 졸업하실 만큼 공부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셨는데, 영어 앞에서 만큼 할아버지에게서 작아지실 정도로 겸손하시다.
사실 그다지 좋은 분은 아니셨다. 성공과 재능이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과 연결된 것은 아니니까. 집안의 많은 사람들(특히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씻을 수 없는 감정적 상처를 주시고 본인 역시 그 성품으로 인해 큰 성공은커녕 큰 실패를 하신 분이셨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필자가 2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필자는 사실 기억 속에 없는 분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본인의 학습에 대한 열정. 공부에 있어서 만큼은 그누구보다 지독하셨던 분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회고를 한다. 알코올중독과 간경화로 작고하시기 전까지도 술 마시면서 영어단어를 보시며, 매일매일 전문 외국서적을 읽으셨다고 어머니께 들었던 기억이 있다. 눈은 항상 매서웠고 질문은 날카로웠다고.
즉 저 책은 필자의 할아버지가 5,6년 정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하루 종일 본인품에서 손때를 묻혀가며 읽었던 사전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저 책이 당연히 100년은 넘은 책이라고 확신하고 아까 언급했던 진품명품 쇼에 저 책을 들고 나가자고 아버지께 졸랐다가 저 책의 진실을 알게 되고 한동안 황당하였던 기억이 있다.
필자는 이물건이 충분히 가보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보면 없던 경외감과 겸손함도 자연스럽게 생기곤 한다. 가끔씩 일을 미루고 싶거나,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고 싶은 날이면 필자의 보물창고에서 이 책을 꺼내서 쓰다듬고 펼쳐보면서 할아버지와 교감을 나누곤 한다. 좋은 분은 아니셨지만, 과연 살아계셨다면 필자의 성장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주셨을까. 매서운 추리와 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가끔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공유될만한 가치가 있고 그로 인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사유하게 하는 물건이라면 충분히 '가보'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평범하지만 위대한 스토리가 있는 물건들 특히나 가족과 관련된 스토리가 있는 상징적인 물건이 집에 하나씩은 아마 있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지정된 가보가 없다면 그런 것을 하나 정도는 만들어서 그 가치에 대해서 항상 생각해보고 타인에게 공유하는 것은 어떨까? 분명 작지만 의미 있는 행동이 될 것이라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