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할 수 없는 내 안의 나
“네 안의 크루엘라가 튀어나올 땐 뭐라고 해야 하지?”
“반가워, 근데 이제 가.”
“좋아. 이제 작별 인사할 시간이야.”
“잘 가. 크루엘라.”
이야기는 반은 흑발, 나머지 절반은 백발로 태어난 고집 센 소녀 에스텔라에서부터 시작한다. 학교에 입학하는 에스텔라에게 엄마는 ‘크루엘라가 튀어나오지 않게’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크루엘라는 에스텔라를 떠나지 않았다.
크루엘라와 에스텔라
“Cruel”이란 ‘잔혹한, 잔인한’ 또는 ‘고통스러운, 괴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다. 반대로 “Estel”이란 ‘믿음’ 또는 ‘희망’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Cruel’과 ‘Estel’이 지닌 양면성은 흑과 백으로 정확히 나뉜 캐릭터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에 잘 드러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크루엘라는 그 어원처럼 때로는 잔혹할 정도로 과격한 악당 캐릭터이지만, 에스텔라는 믿음이나 희망 따위의 어원처럼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다. 학교에 입학할 때 크루엘라에게 작별인사를 고한 에스텔라는 놀랍게도 친구들을 때려눕혀 퇴학을 당했고, 어머니를 잃고는 소매치기 일당과 어울려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별로 믿음직스럽거나 희망적인 모습이 아니다.
어쩌면 에스텔라라는 이름은 그저 주변의 바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크루엘라가 잔혹함을 감추고 사회의 일원으로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주위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크루엘라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던 양어머니는 그녀가 친어머니를 닮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믿음과 소망의 의미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함께 좀도둑질을 하며 자라온 재스퍼와 호러스는 그녀가 과격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에스텔라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에스텔라라는 이름은 애초에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누구에게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와 실제 내 모습이 다를 때가 있다. 일시적인 상황이라면 잠깐 견디고 지나갈 수 있지만 오랜 시간 내가 아닌 듯한 모습으로 사는 것은 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황에 대해 분석심리학은 자아(ego) 개념과 자기(SELF) 개념을 제시한다.
자아(ego)란, 마음의 표층에 위치한 자신이다. 대체로 주변의 기대가 반영되고, 환경의 변화나 일시적인 경험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다. 흔히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마치 가면과도 같은 모습이 자아의 층위에 속한다. 좀도둑으로 살던 에스텔라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리버티 백화점에 출근해서는 상사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화장실 청소까지 열심히 해내는 모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되지 못하고 허드렛일만 하는 에스텔라는 날이 갈수록 지쳐간다.
그에 반해 자기(SELF)는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진정한 자기 자신이다. 분석심리학에서 자기는 한 인간이 성숙해나가는 궁극의 단계로 묘사된다. 우리 마음이 하나의 커다란 구슬이라면, 자아(ego)는 구슬의 표현에 해당하고 자기(SELF)는 구슬의 가장 중심부가 될 것이다. 구슬의 표면에서 심층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고난을 통해 인격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텔라가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에스텔라의 죽음을 선언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새가 태어나기 위해 알을 깨트리는 것처럼 마음의 심층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아의 종말을 선포해야만 한다.
크루엘라는 잔혹하리만큼 영민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그녀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분명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왜 사회의 규범 따위는 차치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잔혹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크루엘라를 응원하는 것일까?
원형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자아(ego)에서 자기(SELF)로의 여정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ego)의 층위에서 어려움을 겪는 에스텔라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혹은 자기(SELF)의 층위에 도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크루엘라를 염원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크루엘라를 미워하지 않는다.
공감할 수 있는 악당?
하지만 아무리 자아의 층위에서 자기의 층위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해도, 크루엘라가 정말 사악해 보이는 모습이었다면 공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이야기는 우리가 크루엘라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악당 이미지에 적절한 범주를 설정해 두었다. 이른바 ‘악함’이 아닌 ‘나쁘지 않음’이다. 니체가 말한 ‘도덕의 계보’를 참고하였다.
서구 문화의 주도권이 헬레니즘(그리스)과 헤브라이즘(기독교)에 있었던 탓에, 서구 문화의 도덕 개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의 ‘좋음과 나쁨’, 두 번째는 기독교의 ‘선과 악’이다. 두 이미지는 애초에 전혀 다른 것이었으나, 헬레니즘 문화와 헤브라이즘 문화가 융합하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혼재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스의 좋음과 기독교의 악이 연결되었고, 그리스의 나쁨과 기독교의 선이 연결되었다.
그리스인에게 도덕은 좋음과 나쁨으로 구분되었다. 쉽게 말해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주도적인 상태을 좋음이라, 소극적이고 억압된 상태를 나쁨이라 표현하였다. 올림푸스의 왕좌를 차지해 세상의 주도권을 쥔 제우스, 지하세계에 숨어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하데스의 이미지가 이것을 잘 드러낸다. 좋음을 상징하는 신들의 왕 제우스는 진취적이고 주도적으로 행동하며, 승리를 거둔 뒤에는 패배자에게 형벌을 주어 패배자가 억압된 상태에 놓이도록 한다.
한편 기독교인에게 도덕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었다. 이집트, 바빌론, 로마로 이어진 오랜 피지배 상태에 놓인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선으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지배계급을 악으로 개념화하였다. 핍박받고 억압된 상황에 놓은 선한 자신들을 언젠가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 생각했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악한 지배계급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자가 벌하리라 믿었다.
그리스인이 말하는 좋음의 상태는 지배계급을 말했고, 나쁨의 상태는 피지배계급을 말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 말하는 선은 피지배계급을 말했고, 악은 지배계급을 말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심층의 의미로 보자면 전혀 다른 두 개념이 표층적으로 연결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리스 문명이 기독교에 서구문화의 왕좌를 내주며 좋음과 나쁨의 도덕관념은 지금에 와서 희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악함’과 다른 ‘좋음’이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악하지 않은 좋음, 즉 사악한 면모를 보이지 않는 진취적인 상태는 여전히 존재한다. 크루엘라가 그것을 보여준다. 에스텔라는 주변이 자신에게 투영하는 이미지와 친어머니의 악행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억압된 상황에 놓이지만, 결국 크루엘라의 모습이 되어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간다. 물론 좀도둑질을 한다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행동까지 세세하게 비판한다면 에스텔라나 크루엘라에게도 악한 모습이 있지만, 캐릭터에 공감할 수 없을 정도의 지나친 악함은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우리가 크루엘라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는 반은 흑발, 나머지 절반은 백발로 태어난 고집 센 소녀 에스텔라에서부터 시작해, 진취적인 모습으로 진정한 자신을 찾은 크루엘라에서 끝났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당신에게 묻는다.
“네 안의 크루엘라가 튀어나올 땐 뭐라고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