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in-off, 위스키 이야기를 이어가며…
인생이란 우리 모두가 견뎌야 하는 희극이다.
- 지옥에서 보낸 한철, 랭보
빛나는 재능으로 시대를 앞지르는 시를 썼지만 방랑, 방황, 반항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았던 Arthur Rimbaud 랭보를 영화화한 토탈 이클립스에서 랭보 Arthur Rimbaud는 문학가의 삶에서 느끼는 회의감을 늘 Absinthe 압생트로 위로받습니다.
열일곱에 시집 한 권을 내고 스무 살에 절필한 뒤 세상을 걸어서 유랑하다 죽은 랭보, 폴 베를린느는 그를 추억하고 그의 추억 앞에는 랭보와 함께 마시던 압생트가 놓여 있습니다.
빈 잔을 준비하고 잔 위에 구멍 뚫린 스푼 위에 각설탕을 올리고 그 위로 술을 붓고 각설탕에 불을 붙이면 술 속에 녹아드는데 이 때 압생트를 마십니다.
각설탕이 술과 만나 불이 붙은 상태로 잔에 떨어지게 되어 압생트 고유의 향이 잘 느껴집니다.
제목과 같이 개기일식(혹은 개기월식)처럼 인생의 짧은 순간을 함께 하며 예술적인 교감을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위스키는 여러 장르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며 종종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 캐릭터의 성격, 관계 또는 투쟁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위스키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분위기, 캐릭터의 깊이, 투쟁, 관계, 쇠퇴와 같은 주제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화면에서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종종 등장인물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거나 변화와 계시를 위한 내러티브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몇해전 몰트위스키에 대해 몇 편의 글을 끄적였습니다.
발베니, 탈리스커, 아드벡, 아란, 몽키숄더, 글렌버기, 글렌피딕까지 몰트위스키 데이트라는 이야기로 함께 할만한 마리와쥬를 직접 만들고 함께 마시며 엮어 가다가 함께했던 이와 더이상 같이 할 수 없어 연재를 중단했는데, 장벽 높은 위스키 이야기를 영화 속 등장으로 아이스 브레이크하며 다시 이어가려합니다.
위스키를 나누는 것은 종종 우정, 신뢰 또는 깊은 관계의 시작을 상징하고 소원했던 인물 간의 화해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와 윌 헌팅(맷 데이먼)이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중요한 장면에 등장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때 등장한 위스키는 1780년 부터 이어온 Jameson Irish Whiskey입니다.
위스키를 혼자 마시는 캐릭터는 종종 개인적인 악마, 정서적 고립 또는 실존적 투쟁을 상징하다보니 ,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Lost in Translation에서 빌 머레이의 캐릭터인 밥 해리스가 일본 위스키 Suntory Hibiki 17 year 산토리 히비키 17의 광고를 촬영합니다.
이 장면에서 그가 내뱉는 유명한 태그 라인은 "편안한 시간에는 산토리 타임을 커어라"입니다.
위스키는 특히 액션이나 범죄 영화에서 남성성, 강인함, 감정 억압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구현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영화 킹스맨 시리즈에는 위스키를 홀짝이는 장면이 제법 많이 등장하는데 첫장면에 나오는 위스키는 달모어 1962입니다만 사실 아직까지 달모어에서는 1962년산 빈티지 위스키를 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달모어 62년(Dalmore 62YO)에서 모티브를 따온것 같습니다.
달모어 62년은 1868, 1876, 1926, 1939년 증류시켜 숙성시킨 4통의 원액으로 딱 12병만 생산한 위스키입니다.
4가지 원액중에 가장 어린 숙성연수가 1939년 원액이 사용되었기에 62년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킹스맨의 감독인 매튜 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위스키 애호가로, 영화 오프닝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생의 고급스러운 것에 대한 킹스맨 비밀 요원들의 감상을 강조하기 위해 빈티지 달모어 1962를 선택했습니다.
속편에서는 영국의 비밀정보단체인 킹스맨 본부가 폭파되면서 시작하는데 생존한 요원 둘은 유사시 대처 매뉴얼이 담긴 ‘최후의 날 규약’에 따라 금고를 연다. 금고 안에 있던 건 위스키 한 병, 그들은 위스키병에서 ‘미국 켄터키’라는 힌트를 얻고, 미국에 위치한 스테이츠맨 본부로 향합니다.
킹스맨: 골든 서클의 주요 무대는 영국이 아닌 미국이죠.
버번의 본고장 미국의 켄터키.
이 버번에는 스테이츠맨(STATESMAN)이라는 상표명이 붙어 있는데, 실제로 켄터키 버번위스키 브랜드 올드 포레스터에서 킹스맨과 콜라보로 출시했습니다.
새로운 대륙을 찾아온 이주민들은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맥주가 없어 럼을 마셨고, 럼에 필요한 당밀이 없자 옥수수와 호밀로 술을 만들었던것이 바로 미국식 위스키 버번이죠.
버번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알코올 농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총알 제조에 사용하는 화약과 버번을 섞어 불이 붙는지의 여부로 알코올 농도를 확인했는데 이 장면은 영화에서도 깨알같이 등장합니다.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는 조니워커 블랙 라벨을 마십니다.
영화 제작자는 이 위스키를 위해 미래지향적인 맞춤형 병까지 만들었는데, 이 병은 팬들 사이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스카치 위스키 블렌드는 영화의 네오 누아르적 미학을 더하며 데커드의 세상과 단절된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조니워커는 속편을 기념하기 위해 한정판 '블레이드 러너 2049' 보틀을 출시했습니다.
2017년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캐릭터는 위스키(조니워커 블랙)는 회상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여 더 좋았던 시절, 잃어버린 사랑 또는 과거의 실수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기억과 개인사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동반자 역할을 합니다.
'흔들지 않고 흔들어 마시는 보드카 마티니'로 마티니에 가려서 살짝 작아보이기는 하지만 위스키하면 빠질 수 없는 영화는 역시 007 시리즈죠.
위스키는 시리즈 전반에 걸쳐 특히 어둡거나 내성적인 순간에 선택하는 또 다른 음료로 등장하는데 보드카 마티니와 마찬가지로 위스키는 세련되고 클래식한 술에 대한 본드의 취향을 드러냅니다.
영국 스파이인 본드는 스카치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영국의 문화 유산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버번을 더 자주 마시는 미국 CIA의 펠릭스 라이터(본드의 CIA 친구)와 차별화되는 특징입니다.
스카이폴에서 본드는 개인적인 악마와 씨름하고, 자신의 충성심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죽음을 마주할 순간, 위스키를 마시는데 위스키는 본드의 복잡하고 종종 문제가 있는 내면을 강조하는 대처 메커니즘이 되기도하고 적과 아군이 권력과 부로 구분되는 본드의 세계에서 위스키는 지위와 취향의 상징으로 작용하기도합니다.
스펙터에서는 M과 함께 위스키를 마시며 대화의 톤을 깊게 하고 두 캐릭터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며 분위기와 톤을 조성하는 데 사용되어 진지한 대화나 본드의 사색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순간을 위한 무대를 마련합니다.
이렇듯 본드 영화에서 위스키는 스타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본드의 세련미와 연약함, 영국 문화와의 유대를 반영하여 본드의 캐릭터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1965년 숀 코넬리 주연 007 첫 작품인 살인면허(원제: Dr. No)에서는 본드의 아파트에 블랙 앤 화이트 스카치 위스키 한 병이 등장합니다.
이후 영화에서 본드가 마시는 다른 브랜드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블랙 앤 화이트는 시리즈 초반에 그의 클래식한 취향을 보여주고 있죠.
1971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에서 본드는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Jack Daniel's 잭 다니엘스를 마시며 미국 배경에 걸맞은 적응력 있는 입맛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역시 초기 본드의 모습이죠.
주인공이 로저 무어로 바뀌는 1973년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에서 본드는 루이지애나에서 미국 버번인 짐 빔을 마시는데 전편처럼 본드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평소 본드가 즐겨 마시는 술과 대조를 이룹니다.
가장 상징적인 위스키 등장 중 하나는 Skyfall스카이폴(2012년)에 등장하는 Macallan맥캘란 1962년산입니다.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는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에서 본드에게 이 위스키를 마시도록 강요하며 실바의 비틀린 성격을 강조하고 본드도 M(주디 덴치)과 함께 아파트에서 맥캘란 18을 마시며 두 사람의 공통된 역사와 그녀에 대한 본드의 충성심을 강조합니다.
2015년 스펙터에서 M(랄프 파인즈)이 본드에게 킹스맨의 첫장면에서 살짝 얼굴을 보였던,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고 비싼 위스키 중 하나인로 달모어 62를 잔에 따라줍니다.
이 선택은 MI6의 이너서클의 명성과 본드의 세련됨을 강조하고 있죠.
갈땐 가더라도 담배 한대 정돈 괜찮잖아?
영화 신세계에서 박성웅배우가 남긴 희대의 명대사를 남기며 병을 든채로 들이킨 위스키는 시바스리갈 25년이죠.
시바스리갈은 영화 속 범죄 조직 내에서 부, 권력, 충성심을 상징하는 반복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조직 내 사치와 배타적인 문화를 강조하며, 등장인물들은 종종 이를 지배권을 주장하거나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교묘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이러한 상징적 사용은 각 캐릭터가 범죄 제국 내에서 위험한 권력 투쟁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충성심, 야망, 부패라는 영화의 주제를 반영합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살해를 당하기전 술자리에서 마셨던 위스키이기도하고, 민주화항쟁을 다룬 영화에서 하정우배우가 마셨던 위스키는 로얄살루트 21년.
영화 헤어질 결심의 엘리트 형사 장해준(박해일)은 용의자이자 유족인 송서래(탕웨이)의 집을 카메라로 몰래 염탐하는데 카메라로 서래의 집을 훑는데 술 한 병이 보입니다.
대만의 싱글몰트 위스키인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
카발란은 편견을 뒤집은 위스키라고 하죠.
오크통 내부에 담긴 술은 조금씩 증발하는데 증발 속도는 환경에 따라 다릅니다.
기온이 낮은 고위도 지역에서는 1년에 약 2~3%가 증발하지만, 기온이 높은 저위도 지역에서는 10%에 이르기때문에 저위도 아열대 기후 생산 위스키임에도 뛰어난 품질의 위스키를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기존의 생각을 뒤집습니다.
영화 속 해준은 일반 형사와 다르게 젠틀한 데다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마치 카발란처럼 영화는 형사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별에 대한 편견을 뒤집습니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카발란 위스키의 팬이며 카발란 위스키를 수입하는 골든블루에서 협찬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로 인해 카발란 위스키 주문이 전년대비 400%이상 증가해 최근엔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 구하기가 꽤 힘들어졌다고 하네요.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조제(한지민)는 할머니가 주워 온 글렌리벳 공병에서 나는 스카치위스키 향을 맡는 것이 취미입니다.
“글렌리벳에서 풍부한 바디감과 아몬드, 시나몬, 오렌지 향이 감돈다”고 말하는 조제.
마지막에 조제와 영석(김주혁)은 글렌리벳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납니다.
영화 속에서 사소한 장치인 위스키를 보카시로 지나치지 않고 오브제로의 의미와 은유를 촘촘히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