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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Jun 20.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관가정

스물. 경주 이야기 02. 천년왕국 신라에서 조선까지, 양동마을 관가정

지금이야 찾는이가 많아 벅적거리긴 하지만, 10년전만 해도 이곳은 그저 시골분위기 물신풍기는 그런 마을 이었다.


경주 양동마을은은 안동 하회마을, 칠곡 매원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3대 반촌이다.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이름난 양동마을은 ‘물(勿)’ 자 형국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경주에서 포항 쪽으로 16km정도 가다 만나는 형산강 중류쯤에, 기름진 안강평야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마을에는 보물과 민속자료가 즐비하여 동네 전체가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경주시는 6년 동안 총 620억을 투입해 양동마을 살리기에 나선다.

하회마을에 영국여왕이 다녀갔다고 먼저 70억 집행해서 마을 입구에 있던 못생긴 양동교회 철거하고 향단아래 나지막한 새로운 양동교회 신축한다.

설계자 김헌.

전신주는 전부 땅속에 묻었고 2007년 73억 투입해 양동마을유물전시관 건립하기 위해마을 입구 4,000평 구입하지만 논의 지반이 낮아 흙 갖다 채우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2층 건물에 외장은 압출 성형 시멘트 판.

경주시는 최첨단 현대 건축물로 양동마을의 위상을 업그레이드한다고도 했다.

양동마을이 하회마을보다 소중한 건 아직 때 묻지 않은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훼손은 시작되는것이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매년 10만 명이 찾던 관광객은 1백만 명으로 늘어나고.

세계적으로 총 890여건의 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세계 역사마을 가운데는 6번째.

우리나라는 '한국 역사마을-하회와 양동'까지 포함해 모두 12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8대 으뜸 명소 선정한다.

1. 자원생태형은 순천만과 창녕 우포늪, 제주 성산 일출봉.

2. 역사문화형은 경주역사유적지구,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수원화성.

3. 문화컨텐츠는 서울 북촌과 삼청동 인사동 전통문화거리, 전주 한옥마을.

양동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현재 국보1, 보물4, 중요민속자료12, 유형문화재2, 기념물1, 민속자료1, 향토문화재2, 등 총 23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양동마을에는 현재 150여 가구 370명이 살제로 살고 있으니 돌아보실때는 기본적이 예의는 지켜야 한다.


손소(1433-1484. 본관 월성)는

풍덕 류씨 류덕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하여 처가살이를 하는중 처갓집인 양동마을로 이주한다.

1454년 書百서백(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堂당 건립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지나가던 도인이 이 집에서 3명의 현인이 태어나리라 예언한다.

1459년 식년문과 급제.

1460년 여강 이씨 이번이 손소를 찾았다.

서백당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번은 無忝무첨(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는 집)堂당 건립합니다. 보물 제411호.

그래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던것이다.

도인이 얘기한 3명 중 한명이 서백당에서 태어난다.

1463년 둘째아들.

이름을 仲暾중돈으로 바꾼다.

손중돈이 태어난것.


조선 태조는 북쪽의 고려유민의 등용을 막아 이후 당상관 이상 벼슬을 한 북한선비는 없고 서원, 향교도 한양 남쪽에만 주로 세운다.

이어 조선 제7대왕 세조도 북방주민들을 홀대해 이시애는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절도사(지금의 군사령관) 강효문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손소는 종사관으로 토벌군 참전하여 진압하고 이시애 사형에 처한다.

세조는 반란진압에 공을 세운 44명을 3등급으로 나누어 땅 下賜하사한다다.

손소는 2등 敵愾功臣적개공신(적을 섬멸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

그래 손소에게는 溪川계천군(양동마을 앞으로 흐르는 실개천의 이름이 계천)이란 칭호가 封君봉군(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품계)되고 설창산 아래 양동마을에 저희 집안이 모여 살게된다.


양동마을은 언덕이 중첩되는 물勿자형 명당으로 임신한 개가 새끼를 낳는 형상이라고 한다.

1489년 손중돈도 식년문과 급제.

손중돈의 여동생은 이웃에 사는 이번의 아들과 결혼하여 이제 씨족사회로 가게되고.

1491년 여동생이 몸을 풀러 서백당을 찾아 아들을 출산한다.

이름 이적(이언적). 이제 서백당에서 두명째.

둘째 아들 손중돈 분가.

양동마을 입구에 觀稼亭관가정(곡식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집)건립한다.

보물 제422호.

솟을 대문 들어서면 자그마한 ㅁ자 안마당은 자연속의 자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우주.

좌로 돌면 사랑채.

손중돈은 벼슬이 공조판서(지금의 건교부 장관)에 이르고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은 손중돈에게 淸白吏청백리 하사한다.

이적(1491-1553)은 양동마을이 좋아 처갓집살이.

호 晦齋회재

(어두운 집, 땅 속은 어둡지만 그곳에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가 밝은 세상에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이적은 외숙인 손중돈에게 수학한다.

1514년 이적도 식년문과에 급제.

중종이 나아갈 적迪에 언彦자 하나 더 붙여 이언적이 된것이고.

1530년 사간원 司諫사간.  

1542년 예조판서(지금의 교육부장관).

노모 奉養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자 이언적의 효성에 감복한 중종은 노모를 가까이 모실 수 있도록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노모를 모실 향단 건립 하사한다.

1573년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

1610년 문묘에 종사하여 대한민국을 빛낸 18현 중 한명이 된것이다.

* 18현: 최치원, 설 총, 안 유,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 황, 성혼, 이 이, 조 헌, 김장생, 송시열, 김 집, 박세채, 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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