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소한 생각들.
이번 나훈아 아저씨 공연에서 화제가 된 게, 그분의 언변이었습니다. 내려올 시간과 장소를 기다리고 있다, 가슴에 꿈이 떨어져서 세계를 돌아다녔다, 나는 노랫말을 쓰는 사람이다 등 여러 문장이 귀에 꽂히고 가슴에 울림을 줬습니다.
여러모로 화제가 된 단어가 '국민'이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해석했지만, 이 국민이라는 단어에 왜 시청자들이 크게 반응했는지 (진짜인진 모르겠으나) 궁금했습니다.
사실, 국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찡해지는 사람도, 뭔가 단결감이 드는 사람도, 혹은 국가주의가 거북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전 이 단어가 '비슷한 생의 감각'을 가진 사람들을 추억하게 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대감이 있는 단어죠.
살다 보면 여러 부조리를 겪습니다. 거악이 일으키는 부조리가 아니라,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여러 벽이 있죠. 코로나로 인해 경기가 침체되고, 이로 인해 고용이 축소되는 상황은 내가 극복할 수 없는 부조리입니다. 직장 내에서 거부할 수 없는 갑질과 어디에도 토로할 수 없는 여러 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재자의 부정부패 등 거악이 아닌 현실 속 부조리에 부딪칠 때마다 우린 좌절하고, 이거야 말로 국어 교과서 가르치는 '한'의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한국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죠.
국민이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위정자와 국민을 나눕니다. 전자는 국회의원과 관료를 비롯해 재벌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나아갑니다. '위정자'라는 단어를 썼지만, 경제적 개념도 들어가네요. 후자는 나와 같은 억울한 고초를 겪고, 부조리에 부딪치는 보통 사람입니다. 테제보다는 무언가의 안티 테제로 존재하는데, 이 안티 테제가 바로 내 삶과 닿아있죠.
어쩌면, 억울함이야 말로 우리가 지금 느끼는 생의 감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를 제외한) 내 능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벽,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 이 부조리를 이용해 특혜를 보는 사람들. 나라는 발전하고, GDP는 성장하고, 서울의 집값은 올라가는데 내 현실은 왜 이런가라는 세속적이고 찌질하고 우울한 질문들. 그 질문의 끝에는 결국 현생에 대한 감각이 그만큼 절망적이라는 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러 정치인을 보면, 필부가 느끼는 생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쉽게 말해, 개천이 이렇게 시궁창인데 너도 그걸 아니?라는 너절한 물음이죠. 원래 정치는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이 하는 거라지만, 과연 시민의 현생이 어떤지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라는 궁극적인 회의감입니다. 꼭 위정자가 우리의 현생을 잘 안다고 해서 정치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을 원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게 성공했고, (거시기하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샐러리맨의 신화'로 브랜딩 되지 않았습니까.
올해의 취준생은 작년보다 힘듭니다. 근 5년 취준 시즌 중에 가장 힘든 기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채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문자 그대로 '경력 없는 신입'은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앞이 안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작은 데에서 시작해 큰 곳으로 가라고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초년생에게 가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취준생을 둔 부모들도 마찬가지고, 이제 새로운 삶을 나아가는 신혼부부도 그럴 겁니다. 이분들이 현생에 대해 무겁다고 느끼는 감각은 저의 그것과 차원이 다를 겁니다.
삶, 인생, 현실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꽤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이 무거움을 탈출하기 위해 누구는 주식을, 술을, 담배를 하죠. 각자만의 비상구입니다.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답을 찾기 어려운 모양새입니다. 이런 생의 감각을 공유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야만 하는 현실을 이해하는 정치인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만, 현실에 공감하고 무언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네요. 거대한 이념에 비하면 사소해 보이는 삶이지만, 이 삶만큼 소중한 게 있겠습니까. 개인의 소중한 삶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럼 아이콘이 있으면 좋겠구나 싶습니다.
아님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