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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May 03. 2024

심장이 없는 아빠

가족 이야기

지난 금토 이틀간 고등학교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은 첫째를 데리고, 친구 두 명 중 한 명은 혼자, 한 명은 5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왔다. 제일 친한 친구들인데 각자의 삶이 바쁜 이유로 자주 만나지 못했었다. 어쩌다 한번 시간 내어 만나더라도 항상 시간이 부족해서 헤어질 때는 얘기하다가 뚝 끊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생각보다 체력이 너무 부족했지만, 없는 체력을 끌어모아 새벽 3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나는 휴직 기간 동안 이런 식의 여행을 자주 갔었다.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은 함께해 줄 친구들도 많았다. 여자들은 보통 같이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고, 오히려 혼자 애를 보는 것보다 같이 힘든 편을 나아하니깐. 차로 1시간 걸리는 친구 집도 아기를 데리고 자주 다녔다. 친구도 우리 집에 아기를 데리고 자주 왔다. 친구도 나도 공동육아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남편은 핸드폰으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둘째 밥을 먹이고 있었다. (보통은 항상 내가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둔다.) 스피커도 아니고 핸드폰으로 틀다니.. 게다가 흘러나오는 노래는 ‘심장이 없어’.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게 무슨 노래냐고 하니 첫째에게 대신 대답한다.

“아빠가 좋아하던 노래야~ 나는 심장이 없어~  아픔을 느낄 수 없어~”

지난주 축구를 다녀오던 길에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오랜만에 들으니 너무 반갑고 좋아서 그날부터 계속 듣고 있단다.

https://youtu.be/TE542TbVUhQ?si=KJx3stsiE3kl_CP9


남편은 나의 예상과 다르게 육아만 하는 일상을 꽤나 힘들어했다. 애들과 잘 놀아주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체력을 많이 쓰는 탓이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든 체력을 아끼기 위해 조금이라도 먼 길을 가면 차를 가져가거나 유모차를 끌고 간다. 안아달라 해도 웬만해선 안아주지 않는다. 남편은 굳이 굳이 첫째와 걸어간다고 하고는, 20분 걸리는 거리를 첫째를 안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돌아온다. 심지어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한 손에는 5kg에 가까운 장바구니를 들고, 한 팔로는 13kg 첫째를 안고 걸어오는 적도 있었다. 집에서 놀아 줄 때도 목마, 이불 바이킹, 썰매 등을 종종 태워준다. 아이들은 그래서 아빠랑 노는 게 너무 즐겁다.


술을 또 좋아하는 남편은 처음에는 내일 회사를 안 가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나중에는 육퇴의 짜릿함을 기념하기 위해 매일 술을 먹었다. 그러다 보니 수면 시간은 항상 1-2시가 되었고, 좀 많이 마신 날은 아마 숙면을 취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종종 일어나는 부부 싸움의 스트레스도 한몫했을 것이고, 남편의 피로는 점점 쌓여갔다.


아이들을 보면서 화 한번 내지 않던 남편이, 어느 순간부터는 화를 누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밥을 얌전하게 먹지 않는 둘째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고, 그럴 때는 내가 건네받아 먹이기도 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일상적인 것(예를 들면 음료수를 엎는다거나, 첫째가 밥을 자꾸 안 먹으려 한다거나)에도 표정이 굳어지며 화를 참고 있었다. 내가 화를 내지 않는데, 남편이 화를 내는 상황이 나도 당황스러웠다. (항상 소리 지르고 화내는 건 나였다.)


그런 남편이 ‘심장이 없어’ 노래를 틀어놓고는 비교적 편안한(?) 얼굴로 “아빠는 심장이 없어서 화 안 나~” 하며 둘째 밥을 먹이고 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여행에서 폭식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운동장을 40분 뛰고 왔다. 돌아온 집에서는 또 ‘심장이 없어~’ 노래가 흘러나왔고, 애들은 화장실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참 웃기면서도 한편으로 남편이 본인만의 스트레스를 해소법을 찾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나 또한 2년간의 육아휴직이 참 고됐다. 물론 회사를 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미친 듯이 힘든 순간도 많았다. 아침에 너무 졸린데 아이 때문에 일어나야 할 때, 나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었다. 3분 거리에 스벅이 있던 예전 집에서는 그냥 모자를 눌러쓰고, 아기띠로 아기를 안고, 사이렌 오더로 아이스 카페라떼와 베이컨치즈토스트를 시키며 스벅으로 갔다. 출근길 전철을 타려고 바쁜 걸음을 하는 사람들을 역행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묘한 짜릿함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덕분에 한동안 스벅 된장녀가 됐다.)

다른 날임

짬짬이 시간을 내서 나의 발전을 위한 일에도 투자했다. 자격증 공부, 운동, 글쓰기, 유튜브 보기 등..

조바심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낸 결론은,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는 것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아이에게 넓은 마음의 엄마가 되어줄 수 있고, 육아도 집안일도 훌륭하게 해내면서 남은 체력으로 하고 싶은 일도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지금은 남들이 보면 MZ 세대 마냥 갓생을 사는 것 같은 일상이 되었다. (매일 명상을 하고, 새벽 요가를 다니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일기도 자주 쓴다.)

가을 아침+ 새벽 요가 =행벅


이런 나를 친구들은 ‘대단하다’, ‘부지런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남편은 내게 ‘게으르다’고 한다. 아무래도 슈퍼우먼을 지향 하긴 하지만 아직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터, 지쳐서 피곤하다고 하며 집에 정리 거리를 그대로 놔둔 것, 건조기에 있는 빨래를 바로 개지 않고 놔둔 것, 아이 아침을 밥이 아닌 시리얼로 때우는 것 등이 눈에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의 육아 휴직이 만 2개월 정도 지난 지금, 남편도 어떻게 보면 부지런하게, 어떻게 보면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지런하게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잠에 들고, 어쩔 때는 게으른 모습으로 어질러진 거실 한가운데 넋이 나가 앉아 있기도 한다. 힘들어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뭔지 알기에 위로해 주고 싶다가도, 마음이 아직 건강하지 못한 와이프는 ‘것 봐 힘들지? 쉽지 않지?’ 속으로 삐죽삐죽 댄다.


최근에 남편은 당근에서 플스를 구입했다. 어제는 30분만 하고 잔다더니 1시간을 넘게 하고 또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침대로 왔다. 아침 7시쯤 내가 새벽 요가를 끝내고 돌아오니, 애들 모두 깨어 신나게 놀고 있었고 남편은 잠이 덜 깨어 힘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나가자마자 첫째가 깨어 엄마를 찾으며 한참 울었다고 한다. 나는 남편을 좀 더 자게 하고 오랜만에 애들 둘과 아침 시간을 보내고, 둘을 데리고 나가 산책도 하고 첫째를 등원시켰다. 돌아와 보니 남편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우렁각시처럼 집 청소, 설거지, 빨래 한 판을 마쳤다. 그리고 10시쯤, 아직 마음이 그리 넓지 못한 와이프는 이 내용을 너무 일기에 쓰고 싶은 마음에 자고 있는 남편을 살포시 깨워 졸려하는 둘째 재우는 것을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금방 잠든 둘째와 두 시간을 더 잤더라)


이제 막 시작된 남편의 육아휴직이 어떻게 흘러갈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힘든 것도 몰라주고 구박하던 남편이, 오히려 너무 쉽게 잘 해낼까 봐 걱정 아닌 걱정도 했었는데. 이리 힘들어하니, 이 또한 쉽지 않다. 수면을 줄여가며 즐기는 방법 말고, 좀 더 건강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본인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잘 찾았으면 좋겠다. ‘심장이 없어서’ 노래를 얼마든지 들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화낼 일 하나 웃어넘기면서, 네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은 소중한 지금을 더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 2023.10.31 복직 한 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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