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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Dec 20. 2023

제주도가 특별한 이유

제주 한달살기(23년 늦여름~)

제주 한달살기 23일차.


둘째가 4일 내내 열이 나다가 오늘 드디어 정상체온으로 떨어지고 온몸에 열꽃이 확 났다. 4일 동안 신기할 정도로 졸려만 했다. 많이 자서 얼굴이 팅팅 부었다. 오늘은 부은 얼굴에 두드러기까지 올라오니 누가 봐도 아픈 아기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돌치레를 하는 것 같다.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더 건강해지겠지.


첫째도 제주도에서 돌치레를 했었다. 첫째가 19개월쯤 되었을 때, 드디어 남편의 2년간 해외 파견이 끝났고 복귀를 기념하기 위해 제주도 여행을 갔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에 3번째 날, 첫째가 갑자기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밤, 기대에 부푼 호텔 수영장은 가보지도 못하고 방에서만 보냈다. 다음 날 집에 돌아와서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의사의 권유로 큰 병원으로 가서 처음으로 피를 뽑고, 링거도 맞았다. 그날 나는 첫째가 그렇게 심하게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검사 결과 별 이상은 없었고, 다행히 병원을 다녀온 다음날 열이 내리며 정상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때 첫째도 온몸에 열꽃이 확 폈었다.



그때 돌발진 뜻이 '돌'즈음에 발생하는 발진이 아니라 '돌발성'발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 돌 즈음 겪어서 다들 '돌'의 뜻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 그래도 첫째는 딱히 돌 즈음에 크게 아프지 않아서 그냥 지나가나 했었는데, 아무래도 아빠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겪나 보다 했었다.


그리고 둘째는 제주도에 와있는 지금, 딱 돌 즈음에 겪은 것이다. 이 정도면 제주도와 인연이 꽤 깊은 거 아닌가.



남편과 연애 시절, 나는 반복되는 싸움과 이별로 너무 지쳐있었다.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 것 만 같은 근거 없는 확신감에 힘들게 이어왔는데, 이제는 정말 끝내야겠다 싶었다. 때마침 사주에만 200만 원을 들였다는 친구의 친구가 매우 용하다는 용산 아재를 추천해 줬다. 그 친구의 친구가 곧 결혼할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을 때 사주를 보았는데, 용산 아재가 이 남자랑은 절대 결혼할 수 없는 인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기분이 나빴지만 무시했는데, 그러고 나서 신기하게도 결혼식 며칠 전날 남자 친구가 술이 떡이 되어 들어와서는 '도저히 너와 결혼할 수 없다'라며 파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첩장까지 다 돌린 상태에서 그 친구는 결국 파혼 소송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것.


'아, 그래 이 아저씨다. 이 아저씨라면 제대로 얘기해 주겠다.' 싶었다. 나보고 '정신 차려라. 헤어져라'라고 얘기해 줄 것을 각오하고 간 것이다.


그렇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얻어왔다. 일단 나와 남편의 성격, 각자 집안의 상황, 관계의 양상 등에 대해 너무 소름이 끼치게 맞췄고, 결론은 '둘은 그렇게 박터지도록 싸우면서 만날 인연'이라는 것이다. 상위 5% 인가? 여하튼 엄청 끈끈한 인연이라 헤어지기도 힘들다고 했다.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지금도 너무너무 힘든데 어떻게 이걸 계속해요?'라고 물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나도 남편도 그걸 다 견딜 수 있는 사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해준 말이, 사주상 우리 둘 싸움의 원인이 시차와 공간차?(정확한 사주 용어가 기억나지 않는다.)에 있는데, 바다를 건너면 그것이 무효화되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가 사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이효리도 제주도에서 조용히 살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우리도 결혼하고 제주도에 가서 사는 것이 어떠냐 했다.


결국 다시 만난 우리는 그때부터 제주도 생각을 자주 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무언가의 힘으로 자꾸 일어나는 것 같은 이 지긋한 싸움들, 그 싸움이 반복되고 평온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진짜 제주도 가서 살까' 하는 얘기를 했다. 꼭 사주가 아니더라도, 제주도에서 사는 건 꿈같은 얘기였다. 오랜 꿈이었던 퇴사도 이룰 수 있다는 거였다. 제주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창의력이라고는 없는 둘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주도에 있는 몇 안 되는 회사에 취업해 보거나, 나는 수학강사, 남편은 제주도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 그런데 공무원 시험을 보려면 도민이어야 하는데, 내가 먼저 돈을 벌고 있어? 뭐 이런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항상 '현실 불가능한 얘기'로 끝나버렸다.


지금 묵고 있는 숙소 옆에 빈 집이 하나 있다. 남편이 첫째와 산책하다 발견하고는 내게 보여주었다. 적당한 크기의 옛날 집 옆에 감귤 창고도 있고, 뒤로 마당도 넓게 있었다. 남편은 처음 보자마자 맘에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살짝 흥분했다. 이 집을 사서 이렇게 이렇게 바꾸면 되겠다며 얘기를 나눴다. 바로 옆 전봇대에 붙은 부동산 번호와 유튜브 채널이 적힌 스티커도 찍어왔다.


그날 저녁,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았다. 우리가 본 집만이 아니라 뒤로 넓게 펼쳐진 감귤밭까지, 무려 3800평의 땅이 매물로 올라와 있었다.

"에이, 그럼 일부만 팔지는 않겠다. “ 남편이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물어나 볼까? “

“...”


나는 그 뒤로 운전하면서 ’ 오~ 이 동네도 좋겠다. ‘, ‘오~부동산이다.’ 하는 얘기들을 괜히 던진다. 남편은 별 반응이 없지만 속으로는 또 꿈꾸고 있지 않을까.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언젠가 제주도에 우리 집이 생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이 제주 한달살기도 꿈같은 얘기였던 때가 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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