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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Dec 24. 2023

주제곡

제주 한달살기(23년 늦여름~)

오늘은 김녕 해수욕장을 가보기 위해 9시쯤 감귤집을 나섰다. 1시간 정도가 걸릴 운전을 위해 커피가 필요했다. 근처에 봐두었던 카페에 잠깐 차를 세웠고,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은 남편이 커피를 사기 위해 내렸다.


남편은 운전에 흥미도 없고 자신도 없어한다. 반면 나는 운전하는 것이 그리 싫지 않다. 아니,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 것은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남편은 운전할 때 대부분 라디오를 튼다. 재미없을 때가 많지만, 나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 라디오든 음악이든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주도권을 갖는 것이 우리만의 규칙 같은 것이다.


운전석에 앉아 곧 마시게 될 '제주 말차 크림라떼'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자연스레 선곡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좋아하는 노래에 커피까지 있으니 완벽한 드라이브가 될 참이었다. 항상 틀던 플레이리스트 채널에서 고를까 하다가, 이번에는 왠지 내가 올려둔 것에서 고르고 싶어졌다. 구독자 300명 정도 되는 아담하고 소중한 나의 채널. 한때 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올렸으나, 요즘은 쉬고 있다. 어느 정도 쏟아 냈기 때문일까, 열정이 좀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 채널에 들어가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할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모아놓고 나니 그 언제보다 만족스러운 자기소개를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ost를 틀었다.


Lu Xiaoyu (路小雨). 첫 곡이 나오는데, 속으로 탄식했다. '아- 너무 좋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에 지내면서 힘들게 방황하던 시기에 많이 듣던 음악이었다. 들을 때마다 그때의 장면, 느낌,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걸 제주도의 아침에 들으니 새로웠다. 항상 이 음악을 들으면 그때의 힘들고 어둡고 외로웠던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우울해지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그 우울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힘들어하던 내면아이가 드디어 좀 위로받은 걸까? 제주도에서 들어서 그런 걸까? 음악에 빠져 있을 때, 남편이 첫째와 함께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음~~ 맛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보통 첫째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으면 다른 노래를 틀어달라고 요구하는데, 다행히 따라갔다 얻어온 감귤 주스를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딱 기대한 완벽한 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15분 정도 달렸는데 옆에 앉은 남편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 나오는 음악을 지루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졸린데 잠들지는 못하고 눈을 반쯤 뜬 채 히마리 없이 앉아있었다.


나는 음악을 계속 듣고 싶어 모른척했다.


남편과 나의 음악 취향은 적당한 교집합이 있다. (개인적인 판단하에) 나의 음악세계가 그의 음악 세계보다 넓기에, 나의 한 5% 정도와 그의 한 50% 정도가 겹치는 것 같다.


남편은 걱정이 굉장히 많은 성격이라, 제일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가 '걱정말아요 그대'이다. 결혼식 축가도 '걱정말아요 그대'를 하고 싶어 해서 한동안 언쟁이 있었다.

'결혼할 때 누가 그런 곡을 하냐' '아니 결혼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지 않냐 다들 공감할 거다' '그래도 결혼식에서는 아닌 것 같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결혼식의 모든 곡을 직접 골랐다. 어린 나에게 ‘결혼’이란 이런 것임을 알려준 딥임팩트에 나오던 'The wedding'을 혼인 서약서 낭독 음악으로, 포레스트 검프의 주제곡을 양가 부모님 인사 음악으로, Ed sheeran의 Photograph을 신랑 입장곡으로 골랐다. 그리고 나의 최애 가수 중 한 명인 우효의 '민들레'를 신랑신부 퇴장곡으로 정했다. (축가는 불러주는 친구에게 맡겼다. 노래를 잘하는 다른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의 방황시절을 함께해 준 제일 친한 친구에게 축가를 부탁했다. 남편은 앨범까지 냈던 친구가 있다며 그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해 축가를 부탁했다. 내 친구는 덜덜덜 떨면서 노래를 겨우 마쳤고, 남편의 친구는 떨지도 않고 능숙하게 마쳤다. 나는 이러나저러나 그저 좋았다.)


이제 곧 태어난 지 3년이 되는 첫째도 취향이 살짝 생긴 듯하다. 작년 시민축제 행사에서 육중완 밴드의 공연을 보고 나서는 한동안 육중완 아저씨를 따라 했다.

육중완 아저씨 따라하는 두돌 즈음의 첫째

공연 이후에도 유튜브로 여러 번 봤고, 관련 추천 영상으로 뜨는 다른 락밴드의 공연들도 봤다. 자주 보는 영상이 몇 개 생겼고, 나는 첫째를 위한 재생목록을 만들었다. 그중에 최애곡을 몇 개 뽑자면 육중완 밴드가 부른 '영원한 친구', '오빠라고 불러다오', '행진',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그리고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걱정말아요 그대.'가 있다. 내가 좋아한다고 보여준 곡들(Coldplay, 잔나비 등)은 대부분 거절당했는데 아빠의 최애곡은 첫째의 취향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이적 버전과 전인권 버전을 모두 좋아한다.

“전인권 아저씨는 (목 긁는 소리로)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르케 불러~“ 라며 흉내를 내기도 한다.




'The Swan'이 흘러나오자, 더 이상 지루해하는 남편을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졸리면 자~"

"..."

"노래가 좀 지루하지?"

"어"

대답이 없던 남편이 내 질문에 부리나케 대답했다.

푸학. 웃음이 터졌다. 어쩜, 예상했던 대로 무지하게 지루해하고 있었네.

"아니, 왜 제주도에까지 와서 이런 노래를 들어야 하는 거야?"

남편은 푸념을 하고, 나는 웃겨서 큭큭 대고 있는데 첫째가 말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틀어줘


그렇게 나의 완벽한 드라이브는 금방 막을 내렸고, 또다시 우리의 차에서는 이번 제주도 여행의 주제곡이 되어버린 '걱정말아요 그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앞으로 커갈 두 아이의 음악 세계는 얼마나 클지, 취향은 어떻게 변할지.

앞으로 우리 가족 드라이브 시간에는 또 어떤 노래들이 흘러나올지, 호기심 어린 기대감에 혼자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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