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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Jan 22. 2024

신기한 것들

음악 일기

2017년 12월.


#1. 날씨가 매우 추운 출근길이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보다도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찬바람이 부는 바깥세상으로 나올 때 드디어 아침잠이 강제로 깨워지는 느낌이다. 출근길의 음악은 중요하다. 회사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온전한 나만의 자유시간이고 그것의 소중함을 극대화시켜 주는 데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오늘은 얼마 전에 끝낸 드라마의 OST가 나온다. X는 마음에 드는 드라마를 접하게 되면 큰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그건 대부분의 드라마가 ‘희망’이라는 것을 한 움큼 가지고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우선 마음에 든다는 건 어쨌거나 공감했다는 것이니깐. 어쩌면 주인공에게 크게 감정이입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런 상태에서 드라마가 던지는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행복해하는지 모른다.

추운 날씨에 덜덜 떨다가 버스를 타니 참 따듯하다. 한정거장만 가면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X는 빈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비록 한정거장이지만 사람이 북적대는 버스는 오히려 자리에 앉는 것이 반경 한 뼘 일지라도 혼자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그 순간에 마침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은 참 따듯하고, 추워서 고이 모아둔 무릎 위 손으로 햇빛이 따사롭게 비친다. X는 그 순간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Y의 미소와 온기가 느껴졌다. ‘공간’이라는 개념의 정의에 따라, 한 공간에 있거나 혹은 다른 공간에 있을 Y는 지금 그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을는지 궁금했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피아노 반주소리가 나온다. 볼륨을 크게 틀어서 음악의 공간감이 느껴진다. 눈앞에 보이는 차가 쌩쌩 달리는 풍경과는 매우 이질적이다. X는 이러한 느낌이 신기하다. 너무 신기해서 얼마나 신기한지 설명까지 하고 싶다. 예를 들어 ‘이 피아노 반주를 치던 그 시간의 그 공간은 참 따듯하고 조용했을 거야. 피아노를 정성스럽게 터치하는 그 손가락이 그러져. 그리고 그 여백의 적막함 까지도 녹음이라는 기술로 전해질 수 있다는 게, 듣는 우리가 느낄 수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지 않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런 게 ‘사랑’인 것 같다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어떠한 느낌, 감정 같은 것. X는 Y를 떠올리며 그런 ‘사랑’을 한다는 마음 든든함을 느꼈다. 추위 따위의 물리적 어려움은 충분히 초월적인 무엇인가로 이겨낼 수 있는 별것도 아닌 고난이다. 발걸음은 그래서 당당해진다. 그렇게 X의 얼굴 표정과 발걸음은 대부분 Y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https://youtu.be/rVizPEHuCFA?si=AKxdSLWvOrsatz61



#2. 그런 X는 사실 어릴 적 굉장히 당당한 여전사 캐릭터였다. 유치원 시절부터 많은 친구들 앞에서 4/4박자 지휘를 했고 초등학교 때는 6년 내내 반장을 맡았다.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건 전혀 떨리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나는 일이었다. 잘하는 것도 참 많았다. 시 대표로 뽑힐 정도로 달리기도 잘했고 그림, 글쓰기는 물론 서예까지 잘했다. 성격도 좋아서 여자 남자 구분 없이 많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한 번은 한 명의 친구가 이유 없이 싫어하며 화를 내고 매일 째려봤지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밝고 착했던 X는 그 친구에게 잘 지내자는 편지를 써주었지만 그 편지는 처참히 찢겨서 화장실 변기 물에 떠내려 갔다. 그래도 X는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화내는 그 친구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된 것처럼 그때의 어린 X는 돌부처 같이 마음이 평온하고 아무렇지 않았다.

도대체 그런 마음의 굳건함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당당하고 잘나던 어린 X의 모습은 어디로 다 사라져 버린 것인지, X는 아직도 궁금하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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