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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뽕삼 Nov 04. 2015

소규모 에세이 ; 달리는 기차 안에서 by 쑥

3인 3색, 같은 소재 달리 보기

열네 번째 소재                                                                                                                                   

글, 사진




남자와 여자가 
연애기간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언제였을까? 
아마 작년 9월에 떠났던 일본 여행에서였을 것이다.

생각보다 넓은 후쿠오카를 단 3박 4일 만에 돌아보기 위해서는 
차를 렌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이래저래 따져봐도 레일 패스를 끊어 기차로 이동하는 것이 싸게 먹히는 방법이라 
우리는 여행 기간 내내 기차를 탔다. 
 밥 먹고, 휴식하고, 관광하는 시간을 빼고는 늘 기차와 함께였다. 

몇 년을 공부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본어와, 
아주 습하고 뜨거운 여름 날씨와,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로 지겹게 시간을 보내야 했던 기차 안에서의 시간. 

4년 차 연인에게 그 시간은 어떠했을까.




여행을 시작하며

- 여행지에서 싸우는 건, 오래된 연인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한 번 타고, 다시 바로 기차로 갈아 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의자에 엉덩이를 4시간 이상 붙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도 우리의 기분은 지나치게 상쾌했다.

왜냐면 오늘도,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우리에게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긴 거니까.

회사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엉덩이의 통증은 즉각 사라지는  듯했다.

내 오랜 로망이었던, 달리는 기차 안에서 도시락도 먹고,

창 밖에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에 잠시 빠져보기도 하고,

잠든 남자를 대신하여 지도를 보면서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까지 모두가 즐거움이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먹는 도시락, 에끼벤은 내 오랜 로망이었다.
그치만 생각보다 짜고 느끼해서 속상했다. 내 입맛이 실망스러웠다.


문득 여행지에서 싸우는 커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너무나 익숙한 내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

이 시간을 말다툼으로 망치게 되면 얼마나 속상할까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안도했다.

우리처럼 오래된 연인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말이다.





여행 1일 차 

- 그렇게 모두가 의심쟁이가 되어간다.



그렇다.

꿈같은 여행 첫 번째 날을 보내고 나서,

나는 고집불통 의심쟁이가 되어 나가사키의 아침을 맞이했다.


남자의 모든 말이 다 반대로 들리는 이상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왼쪽으로 가야 어제 봤던 그 골목길이 나와."

"아닌데. 난 분명히 오른쪽으로 봤는데."

라고 내 안의 의심쟁이가 말했다.


의외로 남자는 인내심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가 주었다.


"노면 열차는 이쪽에서 타면 시내로 가는 거 같은데?"

"아닌데. 반대쪽인데."

라고 또 내 안의 의심쟁이가 말했다. 참고로 난 하급 길치에다가 상급 고집쟁이이다.


남자는 자판기에서 콜라 하나를 뽑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는 그때 처음으로 여자를 나가사키에 두고 홀로 여행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고도 했다.


9월의 나가사키는 뜨겁고 습했다.
지상에 난 레일을 따라 천천히 달리는 나가사키 노면열차.
일본 특유의 차분한 차내 방송이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린다.

"내가 지도 보니까 여기가 확실해. 열차 왔다. 얼른 타자."

"아닌데. 이거 타면 분명히 저~ 위로 반대로 갈 거 같은데."

라고 내 안의 의심쟁이가 마지막 의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남자는 지도를 나에게 남겼다.

그리고 기사님에게 직접 물어보고 타자고 했다.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그리고 기사님은 여기가 종점이고, 더 이상 위로 올라갈 레일이 없다는 것을 손동작으로 보여주었다.




여행 2일 차 

-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맞다고 일단 밀어붙여본다.



여행지에서 싸우는 것은 오래된 연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다짐과 자부가,

만 2일 만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잘 걷는 남자와 잘 아끼는 여자가 만났으니 결과는 보나 마나.


우리는 도보 30분 내외는 무조건 걸어 다녔다.

정말 더워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끈적대는 땀이 흥건하게 흐를 정도였다.

편의점에서 방금 막 사서 포장지를 벗긴 아이스크림이 바로 녹아내렸다.


유후인에서 후쿠오카로 돌아오는 노선은 아주 길었다.

3시간 반 정도 걸리는 구간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아본 노선은 그러했다.

그리고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이상한데? 3시간 반을 한 번에 쭉가지 않아도, 여기에서 갈아타면 될 거 같아."

"아니야. 갈아타는 곳 없어."

"잘 봐봐. 이 역에서 갈아타면 1시간 반 정도 빨리 후쿠오카 역에 도착할 수 있어."

"아니. 갈아타는 곳 없다니까."


남자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그리고 나를 설득하여 <토스> 역에서 일단 하차를 하는 데 성공했다.

평소 논리적이지 못하고 기분파 같았던 남자가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내리게 된 토스역.
작고 조용한 이 역에서 우리는 콜라를 마시며 한참을 고민했다.


이때 남자도 나를 달리 보았다고 한다.

평소 조용하고 화를 잘 내는 법 없던 여자가,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를 다는데

꼭 투견 같았다고 했다. 그래. 나는 사실 그러했던 것이다.


남자는 나를 역무실로 데려다 길을 묻게 하였다.

당연히 내 말이 맞을 거라는 확신으로 승무원에서 질문을 던졌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남자의 말과 똑같았다.


바로 이 역에서 다른 기차로 환승하면, 훨씬 더 빨리 후쿠오카 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남자는 일본어를 공부한 적이 없어 그저 내 얼굴만 빤히 보고 있었다.


난 고민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두 시간 더 걸려 후쿠오카에 도착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날씨가 더워 정신이 이상해졌구나, 하고 나 자신을 이해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남자에게 당신 말이 맞네. 하고 역무실을 빠져 나왔다.



기차를 기다리며 참치 우동을 먹었다. 먹을때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




여행 3일 차 

- 어쩌면 내 말도 맞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내가 생각하는 것 반대로 하면 그게 답이다.

일본어를 모르면서 기가 막히게 길을 찾고 방향을 잡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단 길 찾기만이 아니었다.

맛있겠다 싶어 찾아간 집은 모두 별로였다. 

하지만 남자가 찾은 가게는 거의 맛집이었다. 신기했다.


그래서 여자는 여행 3일 차,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자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기차는 종류가 다양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노란색, 흰색, 회색, 빨간색, 초록색 기차까지.


까무룩 잠든 남자의 얼굴은 몹시 까칠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한참 내려다 보다가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여기서 내려야 하는 거 같지 않아?"


남자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주위를 살피고는, 지도를 한번,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저기요. 아직 1시간이나 남았거든요."

"아... 아닌..."

"뭐?"

"응. 알았다고."

"깨우지 마."

"응."



달리는 차창밖을 아주 오래 내다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 말이 맞지 않았을까? 그래도 한 번쯤은?

나는 고개를 돌려 하염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고집쟁이, 의심쟁이는 벌써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여행 4일 차 

- 꽤 실력 좋은 네 이 케이터를 발견하다.



여행 마지막 날은 몹시 아쉬웠다.

마침 일본에서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여 더욱 그러했다.

여행 내내 날씨가 좋다가 비가 쏟아지니 이제 돌아가라는 뜻인가 싶어 그랬다.


우산을 쓰고 허겁지겁 지하철에 올라타 노선표를 확인하는데

남자가 물었다.


여행의 마지막까지 열차와 함께했다.


"거꾸로 가는 거 같아?"

"그럴 리가."

"그럼 거꾸로 가는 거 맞는대. 자기 말 반대로 해야 맞게 가는 건데."

"사실 반대로 가는 거 같긴 해."

"그럼 옳게 잘 가고 있는 거 맞네."


남자에게 나는 조금은 이상한 내비게이터가 되었다.




여행을 마치며

- 4년 차 연인에게 4일 차 여행이 준 것은.





남자는 의외로 인내심이 강하다.

길을 아주 잘 찾으며, 바디랭귀지에 무척 강하다.

어디서든지 잠을 잘 자지만, 예민해서 깊은 잠을 자지는 못한다.

비난에도 강하며, 맛없는 음식에는 약하다.


여자는 인내심이 의외로 바닥이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난한다.

음식이 맛이 없어도 묵묵히 잘 먹으며 

머리만 닿으면 잠에 빠진다.


그리고 하나 더 알게 된 것은,

내가 모르고 있던 건 내 옆의 이 남자가 아니라

바로 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남자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쑥뽕삼<같은 시선, 다른 생각>

서른을 맞이한 동갑내기 친구 3인의

같은 소재, 다르게 보기 활동을 사진, 그림, 글로 표현한 공동작품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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