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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여행 Feb 25. 2020

범려, 성공 후 떠날 줄 아는 진정한 자유인

사기 인물 이야기(1)-구천을 춘추시대 마지막 패자로 만든 신하

최근까지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꽤 좋아했다.  

산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그들의 모습은 부럽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약초를 캐고, 집을 고치고, 산을 오른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모습에 직장인들은 잠시 자유를 꿈꾼다. 그런 모습이 '로망'이라고 말하는 중년 남성들도 많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인에 흥미를 잃었다.

그들이 자연으로 들어간 데에 '자유의지'가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실패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시한부 인생선고받은 뒤에야 그들은 자연에 갔다.

즉, 그러한 일이 없었다면 자연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Nature 人' 일 뿐, 'freedom 人'은 아니었다.



 

'비움'이 유행이다.

마음을 비우고, 살림을 비운다.

'안 쓰는 책상', '안 입는 옷'을 버리며 미니멀리스트를 실행한다.


하지만 가 잘 쓰고 있는 물건을 버리는 미니멀리스트는 없다.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할 예정이 없는 물건들만 버린다.  

(하긴 잘 사용하는 물건을 버리는 건 낭비니까)




진정한 비움단순히 버리는 것이 아니.  

 

내 손에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용기다.  

내 손안에 없는 걸 버리는 건

내려 놓는 게 아니고 허세다. 빈껍데기다.


로또 1등 당첨금내 손에 가지고 있지만 어려운 이에게 베푸는 일이나,

잘 나가는 의사를 마다하고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는 것도 진정으로 마음을 비웠기에 가능한 행위다.  


아무것도 없는 거지가 "난 모든 걸 비웠어"라는 것과, 재벌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행동은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걸 잃고 나서야 산에 가는게 아니라

잘 쓰는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잘 나갈 때 성공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비움이다.  



 

범려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인물이다. 

정확한 생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BC 490년대가 그의 주 활동 시기다. 

범려는 월나라 구천이 '와신상담'으로 오나라를 멸망케 도와주고, 그를 춘추 최후의 패자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구천은 와신상담을 하며 부차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았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대립하던 시기는 춘추시대에서 가장 극적이고 흥미로운 시대다.

기개넘치는 영웅들이 넘쳐났고, 드라마 같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 오월동주 : 오나라와 월나라가 한배에 탔다는 뜻으로 서로 미워해도 어려운 상황에서는 함께한다.


- 와신상담 : '섶에 눞고 쓸개를 씹는다'.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 부차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는데서 나온 말이다.  


- 동시효빈 : 범려는 월나라 미인인 서시를 이용해 부차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서시는 가슴통증 때문에 자주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아름다워 부녀자들이 너도 나도 따라 다. 무조건 남을 따라 하는 행동을 비꼴 때 쓰는 말이다.  


- 토사구팽 : 사냥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 <삼국지> 한신의 이야기로 알지만, 원조는 범려다. 구천은 월나라의 패자가 됐지만, 범려는 토사구팽을 얘기하며 월나라를 떠나 목숨을 건진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춘추오패였던 오나라 합려는 월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합려는 구천의 기발한 계책(전쟁터에서 맨 앞줄에 죄인들을 세우고 한 명씩 자결을 시키자, 오나라 군대들이 공포심을 느껴 오합지졸이 된다)으로 쟁에서 패하고 죽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복수의 칼을 간 끝에 구천의 항복을 받고 그를 포로로 잡아둔다.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는 끝까지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주장했지만, 부차는 간신 백비의 말을 들어 구천을 살려두는 실수를 저지른다)


부차는 사실 여기까지 밖에 안 되는 인물이다.

월나라에 승리했다는 자만에 취해 칼날은 무뎌지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구천은 오나라에서 천하고 궂은일을 하며 보낸다.


한 번은 부차가 아펐는데, 그의 변까지 찍어먹으며 금방 나을 거라며 아부를 했다. 그가 이런 치욕을 견딘 이유는 수 때문이었다. 와신상담이 여기서 생겨났다.


부차는 구천을 하찮게 보기 시작했고, 마침 범려가 보낸 스파이 '서시'에 취해 월나라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버린다. 드디어 10여 년의 포로생활 끝에 구천은 월나라에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구천은 복수의 반격을 드러냈다. 월나라 재상 범려는 가장 큰 조력자가 된다.



진정한 비움을 실천한 범려




구천은 오나라를 칠 시기만 노리고 있었다.

오나라가 무리한 전쟁으로 두 번이나 패다.

구천은 범려에게 묻는다.

"이제 오나라를 칠 수 있겠소?"

"아직 불가능합니다. 강제로 얻으려 하면 상서롭지 못합니다"


오나라의 군신들이 불화할 때였다.

"이제 칠 수 있겠소?"

"인사의 틈은 보이지만 하늘이 아직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가 죽었다. 구천은 다시 범려에게 물었다.

"지금은 어떻소?"

"거꾸러질 징조가 보입니다. 그러나 천지가 명백한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오나라에 큰 재해가 들었다.

"지금은 칠 수 있지 않소"

"하늘이 감응했으나 아직 인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범려는 신중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상대가 조금의 꿈틀거림도 못하게 무너뜨릴 '결정적인 한방'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가 왔다.

오나라는 멸망하고 부차는 자결한다.


반전의 반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다.

춘추시대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월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난 늘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인생이란 어찌 이다지도 놀랍단 말인가!





구천은 춘추오패가 됐다.


하지만 지금부터 범려가 보여주는 행보는 실로 파격적이다.

보통 일을 도모하고 성공한 뒤에는 누구나 논공행상을 기다리는 법이다.

선거 캠프에 들어가는 이유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내가 밀고 있는 후보가 당선되면 한 자리 꿰차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범려는 역시 고수다. 삶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그는 모두가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돌연 떠난다.  

구천은 그에게 나라를 나눠주겠다는 달콤한 말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이 그런 려를 설득했다. 문종 또한 구천이 춘추오패가 된데 큰 역할을 한 공신이다.  

"일을 다 이루고 곧 부귀영화가 오고 편할 일만 남았는데 왜 떠납니까"

 

범려는 문에게 말했다.  

"나는 새를 잡으면 활을 거두고 교활한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 법입니다.

구천은 환난을 함께 견딜 수는 있으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은 이해하지 못했다.  


범려의 예상은 적중했다. 구천은 나중에 문에게 칼을 주며 자결하도록 했다.

범려의 말대로 구천은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군주였고,

문종의 기대처럼 고난 끝에 무조건 행복이 오지도 않았다.   

 

범려는 사람을 볼 줄 알았고, 문은 사람을 볼 줄 몰랐다.



배를 타고 떠나는 범려의 모습(출처-네이버)


이후 범려의 인생은 확실한 기록이 없다.  

 

서시와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도 있고, 이름을 바꾸고 제나라에 들어가 상인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신중하게 기다릴 줄 아는 성격을 비춰봤을 때 거부가 더 설득력이 있다.  


부귀영화와 안락함이 눈앞에 파도처럼 현실로 다가올때

달콤한 유혹을 떨치고 떠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2,500년이 지난 지금도 범려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이유다. 

범려는 진정한 자유인이고 진정한 비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가득 채우면 흘러넘친다.

그러므로 가득 채우는 것보다는

적당한 때에 멈추는 것이 낫다.


날을 예리하게 세우면

날카로움이 오래가지 못한다.

재물이 많으면 지키기가 어렵고

돈 많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하면

비난받을 일이 생긴다.


일을 이룬 다음에는 뒤로 물러서라.

그것이 하늘의 길이다.

- 노자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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