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여행 - 청해성 시닝
실크로드 여행, 너무 막연했다.
어디를 가야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문제는 여행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중국에 대한 반감과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중국으로 떠나는 여행자가 대폭 줄은데다 실크로드 여행 정보는 더욱 빈곤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 넓다는 점이다.
실크로드 도시가 가장 많은 신장자치구(新彊自治區)는 166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한반도의 7.5배 규모다.
거기에 42만 제곱킬로미터인 감숙성(甘粛省)과 72만 제곱킬로미터인 청해성(淸海省)까지 합치면!
도저히 계산이 안된다.
지도를 볼 수록 여행 코스를 짜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결론을 냈다. '실크로드 여행은 절대 한번으로 끝낼 순 없다'라고.
보통 시안, 돈황, 우루무치 정도만 가고 실크로드 여행을 했다고 하지만 이건'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다. 에피타이저만 먹고 전체 코스 요리를 평가하는 느낌이다. 1단계, 2단계 등으로 실크로드 여행을 계획했다.
첫 여행은 굵직한 실크로드 도시들을 중심으로 크게 한바퀴를 돌 예정이다. 시안을 출발해 시닝과 장예, 가욕관, 돈황을 지나 우루무치, 투루판, 쿠처, 카슈가르, 타슈쿠루간을 거쳐 카라코람하이웨이를 통해 파키스탄 훈자에까지 간다.
두번째 여행은 시안에서 돈황까지 이르는 하서주랑의 도시들을 여행할 계획이다. 세번째 여행은 우루무치에서 시작해 이닝과 선선, 독산자 등 북신장 도시들을 여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아 나의 실크로드 여행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첫번째는 청해성의 성도인 시닝이었다.
청해성은 남한 면적의 7배나 된다. 단 며칠만에 이곳을 여행하기란 불가능이다. 그래서 핵심적으로 고른 곳이 차카염호와 청해호(淸海湖, 칭하이호)였다. 두 곳 다 해발 3천미터에 있는 하늘 호수다.
차카염호는 눈꽃이 피어있는 듯한 소금호수이며, 청해호는 바다로 불러도 될 정도의 거대함이 매력이다. 특히 청해호가는 길에는 '당번고도(唐蕃古道)'가 있다.
당번고도는 1,400년전 당나라 문성공주가 티베트(당시 토번국) 군주인 송첸캄포에게 시집을 갔던 혼례길이다. 문성공주는 시안에서 출발해 라싸까지 3천키로미터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걸었다. 그녀는 청해호 근처 일월산(日月山)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현재 일월산에는 문성공주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시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은 티베트 사원 타얼사(塔尔寺)이다.
사원이라면 이미 그동안 너무 많이 본 터라 처음에는 사실 별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타얼사를 가지 않고 시닝을 떠났다면 아마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다.
타얼사는 티베트인들에게는 중요한 성지이다. 바로 달라이라마가 속해있는 겔룩파의 창시자인 쫑카파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사원이기 때문이다. 시닝의 티베트인들은 이곳을 출발해 오체투지로 라싸까지 긴 여정을 떠난다.
타얼사는 시닝 시내에서 30km가량 떨어져있다.
아침 일찍 타얼사로 가기 위해 봉고차를 개조한 시내버스에 올랐다. 잠시 뒤 한 중년 여성이 차에 타며 현금을 내려고 하니, 기사가 손을 저으며 큐알코드로 결제하라고 했다. 여성은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더니 도저히 안되는지 다시 현금 시도를 했다. 기사는 현금통이 없다며 계속 '不(아닐 부), 不, 不'를 외쳤다. 난감해하는 여성을 보니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내가 휴대폰을 꺼내 결재를 해줬다.
요즘 중국은 모바일 결재가 필수다. 거지도 큐알코드로 동냥을 받는다는 우슷개소리가 나올 정도로, 현금이 없어진지 오래다. 어린 아이부터 지팡이를 짚고 가는 노인까지 모두 지갑대신 휴대폰을 꺼내 결재를 한다.
버스에서 내려 타얼사까지 자연스럽게 그녀와 동행했다. 그녀는 태국 출신으로, 휴가를 내서 5일간 돈황과 시닝을 여행했다고 한다. 타얼사를 끝으로 집에 가는데, 다음 휴가에도 다시 실크로드에 오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처럼 모바일 결재가 서툴어 걱정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모바일 결재 때문에 끙끙댔을텐데도 또 다시 실크로드에 온다는 그녀를 보니, 천 여년 전에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험준한 천산산맥이 실크로드의 장애물이었다면 지금은 첨단 시스템이 오히려 실크로드의 新장애물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타얼사는 중국인, 티베트인 등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적갈색 가사를 입은 티베트 승려가 파는 입장권을 구입한 뒤 사원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팔보여의탑(八宝如意塔) 을 볼 수 있다. 석가모니의 8가지의 덕(탄생, 성장, 출가, 고행, 깨달음, 전파, 열반, 가르침)을 기념하기 위해 1776년에 세워졌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백탑이 무척 잘 어울린다. 손바닥에 나무판자를 덧대고 오체투지를 하는 청년부터 붉은 체크 망토를 걸친 노인까지 팔보여의탑앞에서 두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 모습은 경건하다못해, 가슴속에 파도가 일렁이며 마음이 시큰해졌다.
'티베트(시짱 자치구)'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민감한 키워드다.
티베트는 당나라때는 토번국으로 불리며 강성했던 국가로, 시짱자치구를 포함해 청해성, 감숙성, 사천성, 운남성 일부까지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하지만 원, 청시대에는 지배를 받을 정도로 힘이 약해졌다. 청 멸망 후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선포했지만 중화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개발을 추진했고, 한족을 대거 이주시키는 등 한족화를 서둘렀다.
달라이라마는 그때부터 망명생활을 했다. 현재 14대 달라이라마 망명정부는 인도 다람살라에 있다. 중국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달라이라마를 새로 세웠으며, 모든 인사를 한족으로 교체했다. 외국인들은 오직 단체여행으로만 티베트를 여행할 수 있다.
몇 십년 후의 티베트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 티베트인들은 참으로 아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원에 가면 난 늘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주로 부모님의 건강과 나의 행복을 기원하는데, 이곳에서 난 처음으로 티베트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의 아픔이 곧 끝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타얼사는 규모가 꽤 넓다. 사원 뒷 편의 동네까지 걷다보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정도다.
1717년 7대 달라이라마의 장수를 기원하며 세운 기수전(祈壽殿)을 비롯해, 노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 등이 이어져있다. 또한 의학 공부를 하던 곳도 있다.
주 법당인 대금와전(大金瓦殿)에 도착했다.
쫑카파는 1357년 시닝에서 태어나 7살에 사미계를 받고 16세에 라싸로 향했다. 고승에게 사사를 받고 정진을 거듭해 겔룩파를 창시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무척 그리워했다. 자신의 흰 머리카락을 한웅큼 넣은 편지를 보내며, 보고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쫑카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태어난 자리에 태반을 넣은 불탑을 세우고 마치 저를 바라보듯이 보시면 그리움이 덜 할 것입니다"
1379년 어머니는 이곳에 탑을 세웠고, 탑을 중심으로 1560년 타얼사가 창건됐다. 대금와전은 이 탑을 1711년 개조하면서 만들었다.
대경당(大經堂)은 타얼사 전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한꺼번에 천명이 넘는 승려가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정도다. 내부는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오랜만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경당 이곳 저곳을 천천히 걸었다. 대경당 내부는 정교한 벽화와 양털로 입체감을 넣은 비단인 두이슈로 가득했다. 특히 야크나 양에서 얻은 동물성 기름인 쑤여우화는 타얼사에서만 볼 수 있다. 온도가 올라가면 기름이 녹기 때문에, 쑤여우화 장인은 작업 전에 자신의 손을 얼음물에 넣어 온도를 낮춘다고 하니 불심이 참으로 대단하다.
대경당을 지나면서부터는 한족과 티베트 양식이 혼재된 법당들이 이어져있어 고전미는 사라지지만, 경사진 곳에 있다보니 타얼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밤 비행기로 시간이 없는 태국 여행자와는 헤어지고, 나 홀로 언덕에 올라 한참동안 타얼사를 바라봤다.
눈부시도록 새파란 하늘, 붉은 가사옷을 걸친 승려의 뒷모습,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의 게송(偈頌), 그리고 오체투지. 시닝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