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바람 Mar 22. 2024

답정남에게는 답정녀로

"나 정말 분통이 터져서 주말동안 화병 제대로 나는 줄 알았어요. 결국, 어떻게 처리 됐는지 아세요?. 오 과장님을 담당자로 변경해서 계획서 제출했더라고요?"


“ 우와! 진짜 대단하다. 그 계획 어떻게든 추진하고 싶었나 봐요. 근데 나는 속이 시원한데요. 최대리는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동안 과장님 일도 잘 안 하셨었는데 고생 좀 하시겠어요. 흐흐. ”


“ 아, 그런데 담당자 건너뛰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직장생활 15년차 인데 일 못 하겠다고 해본 적도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나요?. "


  우리 회사 김전무는 신사업 벌이는 걸 엄청 좋아한다. 올해만 해도 회사 내에 큰 사업이 몇 건이나 진행되고 있는데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는 회사와의 계약 연장 구실을 위해선 그럴듯한 실적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김전무가 추진하는 그런 일들은 실속도 없거니와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한 생색내기 위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독불장군 벽창호 같은 그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이미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발령받자마자 거의 마무리 된 기존 사업조차 처음부터 다 뒤집어엎었던 이력도 가지고 있다. 그동안 김전무와 함께 업무를 추진해 본 직원들은 최대리에게 그 사업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과장의 전화를 받은 최대라는 개인 사정으로 올해는 사업 추진이 어려우니 내년에 하겠노라고 본인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사실 최대리는 내년에도 김전무와 마주하며 업무를 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이 말을 하는 것조차도 부담이었다. 그러나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상사의 압력에 눌려 그녀는 일단 눈앞의 급한 불은 끄고자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최대리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오과장이었다.


 " 전무님은 개인 사정 보다 회사 사정이 더 중요한 거니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계획서 좀 써줄 수 있나요?"


" 제가 올해 제 사정은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럼 계획서만 작성해 드리면 될까요?"


  중간중간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계획서만 쓰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오과장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진즉부터 마음이 상해있던 최대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과장 왈, 


" 그럼 전무님과 상의하세요! "


  오과장은 본인의 승진 야망을 위해 상사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다. 김전무가 이곳에 오기 전, 회사는 동료들끼리 화기애애한 태평성대였다. 그때는 오과장에 대한 동료들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김전무가 오고부터 오과장은 숨겨졌던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출세 지향적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김전무 편에 찹쌀떡처럼 찰싹 붙어서 그의 잘 길들여진 아바타처럼 행동했다.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모르게 식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는데 이번엔 박과장으로부터 메신저가 왔다.


 '대리님, 사업계획 문서는 보셨어요? 신청하실 건가요?'


  김전무가 박 과장에게도 미리 언질을 준 듯했다. 아니 업무 담당자가 고사하고 있는데 대체 왜 본인들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지 최대리는 감정 조절이 안되어 거친 숨을 감추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가만히 있을 거냐며 당장 가서 따지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상사에게 따져본 적도, 지시한 업무를 못 하겠다고 해본 적도 없는 유리 가슴이었다. 이 모든 게 처음인지라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고 속에서는 우당탕 천불이 났다. 부정맥 걸린 환자처럼 최대리 심장은 매우 불규칙하게 뛰었다.


  재작년, 그녀는 업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을 겪었고, 다른 부서로 잠시 이동하였다가 다시 본래 부서로 복귀를 했다. 너무 힘들어지면 그만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래고 무장해서 가까스로 돌아온 것이었다. 복귀한 첫 주 그녀는 매우 행복했다. 그때는 그럴만했었다며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제 겨우 심신을 추스르고 직장에 마음 붙이고 일 좀 하려 하는 최대리에게 1년짜리 단기 사업을 받아서 하라는 것은 일을 그만두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과장과 전무 역시 그 당시 최대리가 겪었던 힘들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녀 딴에는 회사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경력이며 금전적 손실도 자발적으로 양보했기에 이런 식의 처우는 너무나도 화가 나고 서운했다. 최대리는 그날 밤 얼마나 분한지 새벽 2시까지 잠도 자지 못했다.


  대체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했는가?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주변을 위해 항상 맞춰주는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최대리는 사십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인생의 굵직한 선택을 할 때도 매번 부모님께 선택권을 내주었고 직장 내에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손해 보더라도 남의 비위를 잘 맞춰주었다. 주인공 없는 삶. 그녀의 인생에 그녀는 없었다. 그렇게라도 사랑받고 싶었구나를 그녀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올해를 시작하며 최대리가 결심했던 것은 기본 도리는 지키되 남을 위해 지나치게 희생하는 그런 삶은 더 이상 살지 말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전무는 그녀를 만나기 10분 전 메신저로 관련 업무 파일을 보내왔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듯…. 최대리는 비장하게 싸울 각오를 하고 김전무를 만났다. 그녀는 메신저로 본 파일을 못 본 척했다. 김전무를 빛내주는 꼭두각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전무는 오과장으로부터 그녀의 개인 사정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무심히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어떤 얘기도 못 들은 사람처럼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끝도 없이 녹음기 틀어 놓은 듯 반복하는 것이었다. 역시 소문에 듣던 대로 그는 답정남이었다. 최대리 역시도 그녀의 상황을 자세히 얘기하다가도 진짜 사람 구질구질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김전무와 최대리 사이에 핑퐁 게임이 시작되었다. 하라는 쪽과 하지 않겠다는 쪽,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녀는 끝까지 못 하겠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최대리는 김전무에 맞서 답정녀가 된 것이었다. 그동안 직원들이 느꼈던 기분을 이번엔 김전무도 조금은 느꼈으리라. 


  전무실을 나서며 최대리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이렇게 쉬운 거였는데 그동안 왜 그리 눌려 살았을까?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 된 채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그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재테크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