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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바람 Apr 11. 2024

너도 이제 내 마음 알겠지

"엄마, 학교에서 시력 검사했는데 선생님이 병원 가보래."

"으응? 너 잘 안 보여? "


  하교 후 집에 온 아들이 오늘 보건실에서 시력 검사를 했는데 시력 검사판의 작은 숫자가 잘 보이지 않았노라고 얘기했다. 작년까지 괜찮았던 눈이 벌써 그렇게 나빠졌을 리 없다는 생각에 나는 아이를 멀찌감치 세워두고 글자를 읽어보게 했다.


" 즐거운 히.... 라...?"

"다시 읽어봐. 진짜 그렇게 보여?"

"엄마아, 나 안경 써야 돼? 나 수술해야 는 거야? 병원 가기 싫어어. 무섭단 말이야아. "


  멀리 있는 글자가 안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안경 쓰기 싫다며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아이가 일부러 안 보이는 척 할리는 없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의 작은 키만 걱정하고 병원에 가고 난리를 피웠지 눈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안 해보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내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나도 그 당시에 참 빨리 안경을 쓴 편이었다. 그때는 안경을 쓰는 사람이 적었던 시절이라 안경 쓰는 게 멋져 보여 안경을 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안경을 쓰고 싶은 철딱서니 없는 맘에 시력검사표의 숫자를 일부러 틀리게 읽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안경은 절대 안 쓸 거다 불편할 거라며 안과에 가기도 전부터 걱정을 고무줄처럼 늘어놓고 있는 것이 진짜 안 보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직 학교에서 시력검사 결과지를 보내주진 않았지만 제대로 안과 검진받게 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던 지라 마음이 급해졌다. 병원에 가야지 마음먹은 그날 밤부터 내 마음은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이 무거웠다. 아이 눈 관리를 제대로 안 해준 내 탓인가 싶다가도, 나만큼 영상이나 게임을 제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가도, 이사 와서 집의 조명을 LED로 바꾸는 일을 차일피일 미뤄서 인가 싶다가도, 최근에 해 준 핸드폰 탓인가 싶기도 했다. 그냥 단순 근시겠지. 다른 건 아니겠지. 처음엔 안경은 안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안경으로도 교정 안 되는 눈도 있다던데 차라리 근시인 게 낫겠다는 마음으로 점차 바뀌었다.


  다음날 아이가 하교하자마자 모든 일정 다 제치고 안과로 향했다. 시력 검사를 두 번이나 해야 했는데 두 번째 검사는 산동검사로 눈에 안약을 넣어 동공을 확대시킨 후 하는 검사였다. 안약을 넣고 눈을 감고 있어야 검사를 더 빨리 할 수 있다고 하는데 30분 넘는 시간을 인내하기엔 아이에겐 너무 긴 시간이었다. 갖은 몸부림을 견딘 끝에 검사를 할 수 있었다. 정확한 검사를 위한 두 번째 검사에서도 아이는 안경을 써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병원에 가기 전 열심히 검색한 결과 근시는 유전적인 요인이 80프로는 된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내려놓았음에도 속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만 눈이 나쁜 게 아니라 남편도 어릴 때부터 안경을 썼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누굴 닮아서 눈이 좋을 수가 있겠니. 좋은 것만 물려줘도 부족한 내 보물 같은 아이에게 나와 남편의 단점을 고스란히 물려주다니.... 수술 안 한다면 평생을 안경 쓴 채로 살아야 할 텐데... 그나마 수술이라도 되면 다행인데 그게 될지 안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애라 운동도 하고 친구들과 격하게 놀다 보면 나보다 더 불편할 텐데...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안경이나 렌즈는 수술하지 않는 이상은 벗을 수가 없을 터이니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의사 선생님은 눈치챈 듯, 요즘 아이들이 고등학생 되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안경을 쓰게 되는데 자녀분이 그중 안경 안 쓰는 한 명이 되긴 어렵겠죠라고 하시며 내 마음을 달래주셨다. 결국 안경처방전을 받아 병원을 나오는데 삼십여 년 전 내가 안경 맞추던 날이 떠올랐다.

 

   어느 날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엄마에게 말씀드렸고 난 그 길로 안경점에 가야 했다. 시력 검사 후 바로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아빠는 안경사에게 ' 꿩처럼 처박고 맨날 책 보더니 눈이 나빠졌어요!!'라고 안경원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릴 때 내가 책벌레였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게 어찌나 인상적인 말이었던지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그 말이 기억이 난다. 아빠는 하고 많은 동물 중에 어떻게 나를 고깟 꿩에 비유했을까, 그리고 굳이 처박고라고 상스럽게 표현해야 했을까하며 기분이 매우 나빴다. 그런데 그때 그 아빠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병원을 나서며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속상했길래... 그렇게 말씀 하셨을지. 그 깊이를, 사랑을 삼십여 년이 지난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안경을 쓰고 등교하던 첫날, 나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그때 난 겨우 3학년이었고, 우리 반에서 안경 쓰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안경을 쓴다는 것에 대해 겨우 2학년인 우리 아들과는 다르게 3학년의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부럽고 신기한 맘에 자기도 한번 써보겠다며 안경 좀 벗어 달라는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그런 친구들 덕분에 싫은 마음 대신 오히려 즐겁기도 했었던 듯하다. 하지만 우리 아들보다 철없고 무지했던 나는 그날을 시작으로 안경과 한 몸이 되어 20여 년의 시간 동안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이의 안경을 맞추고 오던 날, 반찬 가져가라는 엄마 말씀에 친정에 들렀다. 반찬 가방을 들고 친정을 나서려는 내게 엄마는,


" 이제 너도 내 마음 알겠지? 네가 처음 안경 쓰던 날 내 마음이 어땠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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