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편에 이어서 경제학자 하이에크에 관하여.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다른 의견
위의 의견들과 전의 케인스의 의견을 보면 둘이 맞설 전선이 그려진다.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의견을 정확하게 구분 짓기 위해 설명하자면’, 케인스는 실업 문제를 비롯해 민생을 좀 더 순탄하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반면 하이에크는 시장은 인위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자연적인 힘에 따라 작동하며, 따라서 정부가 시장에 간섭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봤다.
케인스는 경제의 작동을 좀 더 잘 이해한다면 책임 있는 정부가 경기 순환의 바닥에서 생기는 최악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하이에크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경제가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제의 작동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경제 정책을 수립하려는 시도는 칼을 쓸 줄 안다고 사람 몸에 칼을 들이대는 이발사의 원시적 외과수술처럼 이롭기보다 해로울 공산이 크다는 것이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삶을 이해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다. 케인스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하이에크는 인간은 다른 모든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경제의 자연법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권력자들이 올바른 결정만 내린다면 삶이 지금처럼 힘겨울 필요는 없다고 보는 낙관적인 입장이었지만, 하이에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으며, 자연법칙을 바꾸려는 시도는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비관적인 입장이었다.
세계가 새로운 시대의 획을 긋는 1929년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되는 각자의 견해를 연마했다. 그리고 1929년 10월, 미국 주식 시장 붕괴로 세계는 급속하게 금융대란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싶어 했고, 탈출구를 찾아 혼란에서 빨리 벗어나려 했다. 흥청거리던 ‘광란의 1920년대’는 순식간에 침체의 늪을 향해 달려갔다. 세계는 10년이나 끌게 될 기나긴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대량 실업과 빈곤의 이중고는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의 심연이었다. 희망도 없는 험악한 새로운 환경에서 낙관주의자 케인스는 혼란에서 벗어날 참신하고 명확한 출구를 순발력 있게 제시했다. 반면 비관주의자 하이에크는 경제 시스템을 교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왜 아무 소용도 없는지 그 원리를 제시하는 길로 나아갔다.
오랫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던 하이에크
당연히 상대적으로 암울한 상황에서 해결책이 아닌 원리만을 말하는 목소리는 묻히고, 명확한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케인스의 생각은 희망이자 세상에서 두루 환영 받았다. 하이에크가 제시하는 침울한 진단은 옳든 아니든 심각한 것이었지만 행동하지 말고 가만있자는 전혀 매력없는 태도를 두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의 비판적 태도는 논리적이었지만, 정치인들더러 경제의 혼란의 탈출구를 찾아내라는 대중의 아우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 이후에도 케인스가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에 비해, 하이에크는 케인스처럼 존경받지는 못했고, 몇몇 경제학자들은 그가 경제학을 그만뒀다고까지 생각했다. 그의 책들에 대한 비판과, 우울증,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로 낙심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금전적인 문제와 심적인 문제로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하이에크 뒤늦게 빛을 발하다.
하이에크는 동트기 전 새벽의 가장 어두운 암흑기를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막히는 게 없던 것 같던 케인스주의도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출현한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출현과 더불어 1974년은 케인스주의자들에게 끔찍한 한 해였고, 반면에 하이에크의 명성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가 언젠가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회원들에게 “케인스 이론의 결함이 분명히 드러나기 전까지는 수십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것처럼 하이에크는 이 순간을 위해서 많은 세월을 버텨왔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다시 힘을 불어넣고자 했던 하이에크의 기나긴 모색은 이때 큰 탄력을 받았고, 바로 그 해에 하이에크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정치권이 한쪽 편만 들으면 비난을 받을 것 같아 같이 주었다는 말도 많지만, 어찌됐든 노벨상은 하이에크에게 개인적으로 큰 힘이 됐다. 여러 해 동안 앓았던 우울증도 수상과 더불어 가시는 듯 했다.
그는 수상연설로 논란거리를 피해가는 관례를 무시한 채 자신이 왜 케인스 혁명에 홀리지 않았는지 진솔하게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을 이끌어 온 이론은 ‘근본적인 오류’를 안고 있으며 ‘허풍’이다. 또 스태그플레이션은 ‘경제학자들 대다수가 정부에 권고하고 나아가 강력히 촉구했던 정책이 유발한 것’이니 사회가 스스로 자초한 상처.”라고 말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려면 실업이 더 늘어나고 광범위한 기업이 파산하는 고통스러운 재조정을 겪을 수밖에 없을 텐데, 정확히 어떻게 “균형이 다시 자리 잡을지”는 자신도 모르며 경제학자들 전부의 지식을 합쳐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이에크는 시상식에 자리한 청중에게 시장을 형성하는 끝없이 복잡한 요인들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장을 구기 종목 경기라고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경기에 나갈 선수들에 대한 중요한 사실, 가령 “그들의 주의력과 인지 감각의 상태, 심장과 폐와 근육 등의 상태 등을 경기의 매 순간마다 정확히 알고 있다면, 아마도 경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낼 수 없고, 따라서 경기의 결과는 과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영역을 벗어난다”라면서 경제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업은 화초가 자라도록 정원을 가꿀 때처럼 “성장이라는 화초가 자라는데 필요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보수당 대표가 된 마거릿 대처
이 무렵 영국의 상황은 갑자기 하이에크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돌아갔다. 서구에서 선거에 관한 한 가장 성공적이었던 영국 보수당이 두차례 선거에서의 뼈아픈 패배이후,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두차례의 패배로 보수당 총리 에드워드 히스가 총리 관저에서 쫒겨나고 대놓고 하이에크를 치켜세우는 마거릿 대처가 승리했다
보수당의 당권을 장악한 직후, 대처는 가방 속에서 하이에크의 ‘자유의 권능을 세우다’를 꺼내더니 탁자에 쾅하고 던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바로 이거다.”
대처는 정부가 유지하는 공공 부문의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세금은 줄이고, 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를 풀고, 국가 채무를 상환하는 데 더해 “사유화”라는 이름으로 국가 자산을 민간에 매각했으며 통화량도 줄였다. 이러한 행보는 완연한 하이에크의 사고방식에다가 프리드먼을 약간 가미한 것이었다. 대처가 채용한 통화주의적 사고는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대처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당시 즈음 미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처와 같은 노선을 가지고 “우리 생활과 호주머니에 간섭하지 않는 정부를 만들자.”라는 하이에크적 표어를 내걸었던 레이건이 1981년 당선된 것이다. 그는 하이에크와 같은 시장주의자인 시카고 학파 밀턴 프리드먼 교수 이론을 기반으로 ‘레이거 노믹스’를 실행했다.
하지만 체제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고, 금방 효과가 있지도 않았다. 삼 년이나 고통이 계속되었고, 시민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은 다행히 전쟁에서 이겨서 하이에크 방식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이후 1991년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져가고, 소련연방이 해체되었다. 그동안 세계를 양분했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둔 것. 대처의 영향력이 커졌고 하이에크는 세계를 휩쓸었다.
이렇게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엎치락 뒤치락 하기도 하였고, 하이에크는 빛을 발했다가 빛을 잃기도 하였다. 두 학문이 열심히 대립하였지만, 둘 다 그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이에크 학문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하며 하이에크 공부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보수주의자와는 극도로 거리가 멀었던 하이에크는 자유지상주의자가 됐지만, 그렇다고 무정부 상태로 살자고 하지는 않았다.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을 정부 말고 사적 기업들이 수행하도록 하자는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저런 서비스를 제공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 중앙정부가 결정할 필요는 없으며, 중앙 정부가 그런 일을 결정하는 강제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대신 하이에크는 “준상업적 기업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시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을 생각했다. 해당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기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이렇게 다르고, 같은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살펴보았을 때 당신은 어떤 주장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위에서 아래로(탑바텀) 케어를 해야한다는 큰 정부 입장인 케인스인가 아니면 아래에서 위(바텀탑)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인 신자유주의의 하이에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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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케인스와 하이에크 – 니컬러스 웝셧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제5부 국가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참고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FXezfpt0Kbg&list=PL2cXnoEDdx5KKmA-td6Z3vqgS3SRrD-G_
경제를 공부하며 사람들과 경제에 관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