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최고의 인생을 만나는 뜻밖의 길

by 신하영

최고의 인생을 만나는 뜻밖의 길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 논설위원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후일 높은 성취를 이룬 많은 이들처럼, 훗날 소설가가 된 이 청년은 선생님이 강조하는 것엔 관심을 두지 못했고 오직 자신이 흥미 있는 것만 공부했다.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을 몇 학점 앞둔 시점에 도쿄에 작은 재즈 클럽을 열었다. 엄청난 노력 끝에 생계를 유지하며 직원을 고용하고 장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1978년, 무라카미는 일본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야구 경기를 관전 중이었다. 그의 응원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선두 타자가 왼쪽 라인을 따라 공을 날렸다. 타자가 2루에 진루하는 순간, 무라카미 머릿속에 문득 스쳤다. "소설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재즈 클럽 영업이 끝난 후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원고를 한 문학 잡지사에 보냈다. 너무 무심한 나머지 원고를 잃어버릴 경우에 대비한 사본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 작품은 상을 받았고 다음 해 여름 출간됐다. 그는 유일한 안정적 수입원이던 바를 매각하고 글쓰기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008년 회고록에서 "저는 무언가를 할 때면 완전히 몰입해야 하는 성격입니다"라고 썼다.

바 운영의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자 체중이 늘기 시작했다. 그는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고 달리기가 적합해 보였다. 집 바로 옆에 트랙이 있었고, 별다른 장비 없이 혼자 할 수 있었다. 그의 '완전 몰입' 성향은 허세가 아니었다.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연중 매주 6일, 하루 6마일(약 9.7km)을 꾸준히 달렸다. 23회의 마라톤 완주는 물론, 수많은 장거리 레이스와 울트라마라톤, 철인삼종경기에도 참가했다.

젊었을 때조차 그의 기록은 뛰어나지 않았고, 달리기는 대부분 고통스러웠다.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에는 경주마다 느낀 고통이 생생히 묘사된다. "이번 레이스는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23마일(37km)쯤 되면 모든 게 싫어진다", "결승선에 닿았을 때 성취감은 없고 달리기를 그만둔다는 안도감만 가득했다", "체력이 바닥났고 한동안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의문이 떠올랐다. 왜 정기적으로 고통을 자초할까. 하지만 주변을 보면 불편함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에베레스트 등반, 남극 횡단, 대서양 노 젓기 같은 극한 도전을 하는 모험가들만이 아니다. 우리 일상 속에도 있다. 바이올린을 배우며 지루함을 견뎌내는 사람,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계단 난간에서 반복해 떨어지는 사람, 과학적 난제 해결을 위해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 타인 관리라는 어려운 직무를 맡는 사람, 미친 듯이 힘든 창업을 선택하는 사람.

나 자신이 선택한 고통은 '글쓰기'다. 물론 지금은 생계 수단이니 외적 보상이 따른다. 하지만 돈이 되기 전에도 썼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 돈 자체로는 동기부여가 부족하다. 40년 넘게 매일 아침, 일주일 내내 사무실로 걸어가 1,200단어를 써낸다. 글쓰기는 즐겁지 않다. 대부분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글 구조를 잡는 일만 해도 엄청나게 어렵고 경험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즐기진 않지만 쓰고 싶다. 일어나 사무실로 향하는 건 그냥 내가 하는 일이다. 삶에 구조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상적 행위다. 즐겁진 않아도 소중하다.

우린 인간이 쾌락주의나 실용적 논리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적은 노력으로 큰 보상을 얻으려 한다. 노력은 힘들기에 피하고 싶어 한다. 생각하는 노력조차도. 물론 우리는 자주 그런 논리로 움직인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엔 다르다. 진정 소중한 것(소명, 가족, 정체성, 삶에 목적을 주는 모든 것)앞에선 다른 논리가 작동한다. 강렬한 열망과 고통스러운 노력의 논리다.

달리 표현해보자. 평범한 마음가짐일 땐 손익분석을 한다. 하지만 위대한 성취는 평범한 마음가짐으로 이뤄진 적이 없다. 사람들은 매료되어 거대한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힘든 도전을 견딘다. 어떤 생각이나 활동이 그들을 사로잡고, 내면에 갈고리를 박으며, 가능성을 깨우고 상상력을 불태운다.

매혹의 순간은 미묘할 수 있다. 야구선수가 2루타를 치자 무라카미가 소설을 써볼까 생각했다. 집 옆에 트랙이 있으니 달리기를 시작해볼까. 하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어떤 활동이나 이상에 대한 헌신이 시작된다. 조용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매혹당할 수 있는 능력은 과소평가된 재능이다. 어떤 이들은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인생을 산다. 학교나 직장이 그들에게 실용적·도구적·효율 최적화 사고를 심었다. 압박 속에 살아 고개를 숙인 채, 기쁨에 마음을 열지 않고 인생을 바꿀 황홀한 순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어떤 이들은 특별한 수용성을 지닌다.

그들은 내면의 조용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설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민감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열정적이고 흡수력이 좋으며 포용적이다. 놀라움에 열려 있고, 건설적인 혼란 속에서 멈추어 묻는다. '지금 내게 요구되는 건 뭘까?' 위대한 여정은 대부분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데카르트가 지적했듯, 경이는 '영혼의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다.

인생을 바꾸는 매혹을 일으키는 경험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멋지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난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모스 하트는 브롱스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브로드웨이에 가서 무대에 상상력을 펼치는 연극을 보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했다. 그날 한 극작가가 태어났다.

다른 이들은 아름다움과의 만남으로 소명을 찾는다. 우주의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느낀 천문학도, 부드럽게 작동하는 엔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기계공. 3살 예후디 메뉴인은 바이올리니스트 루이스 퍼싱거의 연주회를 간 후 부모에게 "4살 생일 선물로 바이올린을 달라"고 했다. 수십 년 후 그는 "연주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고 회상했다.

과학자의 길은 작은 관찰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이상하네." 4살 아인슈타인은 손에 쥔 나침반 바늘이 우주의 보이지 않는 힘에 움직이는 걸 보고 평생 그 힘을 탐구했다. 누군가 삶을 움켜쥐는 진실을 말해줘 공공 봉사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도 있다. 22살 토니 와그너가 간디의 제자에게 혁명의 정의를 물었다. 그는 "혁명은 개인의 미덕을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 역동적 과정"이라고 답했다. 와그너는 즉시 그 과정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가 교육임을 깨닫고 평생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쳤다.

이 모든 경우에 점화의 순간이 있다. 외부의 무언가가 내면 깊은 곳을 건드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나는 이를 '선언의 순간'이라 부른다. 소명을 받는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을 예견하는 순간이다. 오스트리아 시인 휴고 폰 호프만슈탈은 물었다. "당신의 자아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당신이 경험한 가장 깊은 매혹 속에 항상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순간을 졸업식 연설의 클리셰('열정을 따르라', '마음을 따르라')로 포장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너무 모호해 아무 의미도 없다. 통제 불가능한 열망에 사로잡힌 순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 어떻게 열렬한 헌신이 자라나 삶을 장악하고 자발적 고통을 감내하게 할까.


◇열정의 역설적 메커니즘

이 과정은 신비로움에서 시작된다. 사랑에 빠지듯, 점화의 순간은 우리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흥미가 불붙고 열망이 형성되는 존재의 동기 핵심)에서 일어난다. 이 부분은 쉽게 들여다볼 수 없다. 왜 지질학이 아닌 천문학에 관심이 갈까. 왜 렘브란트엔 매료되고 엘 그레코에선 냉담해질까. 왜 그녀를 사랑하고 다른 이는 아닐까. 모른다. 우리는 인생 메뉴에서 무엇을 주문할지는 선택할 수 있지만, 무엇을 좋아할지는 선택할 수 없다.

모든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는 마음의 야생에서 일어난다. 미세한 예감으로 시작되지만 곧 놀라운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숭고한 비이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 도시, 활동과 사랑에 빠지는 건 계산 때문이 아니다. 이성보다 강력하고 어둡고 열정적인 힘에 불이 붙어, 당신을 비추고 정복하며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명이나 천직의 다음 단계는 호기심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녀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호기심은 마음의 에로스(eros)요 추진력이다.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호기심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한 등장인물은 이를 '가장 순수한 불복종' 이라 불렀다. 호기심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두려움마저 무릅쓰고 탐험하게 한다. 호기심은 안락한 자리를 뛰어넘어 미지의 세계로 끌고 간다. 무라카미는 소설 '1Q84'에서 이런 성가신 호기심을 묘사했다. "지도를 보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장소가 있다. 대개는 왠지 모르게 아주 멀고 가기 힘든 곳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론 물리학이 너무 고통스러워 오직 열정적 호기심만이 그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학자의 종교적 감정은 자연법칙의 조화에 대한 황홀한 경외감의 형태를 띤다"고 썼다.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이 주는 경외감은 인간 정신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감정 중 하나다. 음악과 시가 전해주는 최고의 감정과 견줄 만한 심미적 열정이다"라고 했다.

모든 열정처럼 호기심도 본능에서 체계적 기술로 전환되어야 한다. 훌륭한 학교는 학생들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훈련하는 법을 가르친다. 효과적으로 호기심을 지닌 사람들은 인지적 열정(수수께끼를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걸 즐김), 인지적 자신감(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용기), 인지적 복잡성(단순한 고정관념에 만족하지 않음)을 지닌다.

열정적 삶의 다음 단계인 괴리(discrepancy)는 머지않아 찾아온다. 탐구자는 자신이 아는 것과 알고 싶은 것, 현재 실력과 목표 실력 사이의 거대한 격차를 인지한다. 발레, 공학, 양육이든, 탐구자는 부족한 점을 겸손히 인정하면서도 높은 이상을 품고 그 격차를 좁힐 자신감을 지닌다.

열망은 괴리감에서 흘러나온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최소 네 가지 기본적 욕구(자율성, 소속감, 유능감, 의미)가 있다. 그중 유능감 추구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다. 아무리 사소한 활동이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더 잘하려는 본능적 욕구를 느낀다. 이중 줄넘기를 배우는 아이들, 집 앞 차도에서 슛 연습하는 나, 팬케이크 뒤집기 실력이 는 걸 자랑하는 사람까지. 개선을 추구할 때마다 우리는 능력의 한계, 인생의 위험한 절벽 가장자리에 서며 작은 성취마다 내재된 스릴을 느낀다.


◇숙련의 길 '고통을 넘어서'

그다음엔 숙련의 첫맛이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쓴 에런 소킨은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시작한 동기를 설명해야 했다. 그는 저커버그가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저커버그 본인은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했다. "사람들은 누군가 단지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서 만든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코더들이 코딩에 미쳐가는 건 단지 코딩을 좋아하기 때문일 수 있다. 코딩이든 요리든 가드닝이든,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기술에서 탁월함을 성취하고 싶어 한다.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며 더 유능해지려는 욕구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잡지 기사를 시로 번역하고 다시 산문으로 바꾸며 글쓰기를 스스로 터득한 이유다. 빌 브래들리가 안경에 판지를 붙여 시야를 가린 채 농구 드리블을 연마한 이유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죽음의 병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일부를 다시 쓴 이유다.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숨을 내쉬며 그는 작품을 더 낫게,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의 기술에 깊이 몰입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종종 '존2의 삶(저강도 지속 운동 트렌드에서 유래)'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광적이지 않고 꾸준하다. 정신없이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고랑을 가는 것처럼 조금씩 매일 전진한다. 그들은 '공격적 정신'으로 산다. 어떤 긍정적 매력에 이끌리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밀려가지 않는다. 장애물을 위협이 아닌 도전으로 인식한다. 좋은 날에는 자신에게 딱 맞는 난이도를 부여한다. 행복은 보통 원하는 걸 얻거나 편안히 사는 게 아니다. 한 시간 한 시간 겨우 감당할 수 있는 난이도에서 사는 것이다.

장인 수준에 이르면 결과뿐 아니라 과정, 작은 훈련, 긴 시간, 무자비한 노동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록스타가 되고 싶다면 음악 만들고 투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장인은 분야 지식을 내면화해 직관으로 작업한다. 규칙이 아닌 감에 의존하며 자신의 레퍼토리를 활용한다. W.H. 오든은 이를 완벽히 포착했다.

그 일이 그 사람의 소명인지 알려면

그가 하는 일을 볼 필요 없이

그저 눈빛만 보라.

소스를 섞는 요리사, 첫 절개를 하는 외과의사,

선하증권을 작성하는 점원.

모두 같은 몰입한 표정을 지닌다,

기능 속에서 자신을 잊으며.

그 대상에 집중하는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여가의 삶을 산다. 오늘날 '여가'는 일하지 않을 때의 휴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여가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원하는 일을 할 때의 마음가짐이었다. '학교(school)'는 '여가(schole)'에서 유래했다. 학교는 열정적으로 지식을 탐구하는 장소여야 한다. 무라카미는 회고록에서 글쓰기를 일로, 달리기를 여가로 구분하지 않았다. 둘 다 상호 연결된 여가의 형태였다.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듯, "저는 탐구하고, 노력하며, 온 마음을 다해 그림에 빠져 있습니다."

여가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은 사람과 정반대다. 외부 과시가 아닌 내적 추진력으로 움직인다. 이런 마음가짐은 성장 과정의 고통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힘든 작업은 본성의 발현처럼 느껴진다—채소를 끝없이 써는 요리사, 벽돌을 끝없이 쌓는 석공. 각자 고유의 리듬에 빠진다. 무라카미는 "아무리 평범한 행동이라도 오래하면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행위가 된다"고 썼다. 세상을 사는 당신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된다. 미켈란젤로는 "손에 끌을 쥐고 있을 때만 모든 게 제자리에 있다"고 고백했다.

노력 자체가 보상이 된다. 등산가들은 종종 가장 쉬운 루트가 아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루트를 선택한다. 도전과 성장, 노력 자체의 열매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중부 한 식료품점에서 선반의 모든 병이 완벽히 정렬된 걸 본 적이 있다. 누군가 제대로 해내는 즐거움을 위해 추가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우리 삶은 이런 일상적 탁월함으로 달콤해진다. 식료품점에서 유쾌하고 능숙하게 계산해주는 직원, 호텔 리셉션에서 매끄럽게 체크인을 도와주는 직원 말이다.


◇고통의 의미 재발견

거대한 프로젝트에 헌신하면 고통과의 관계가 변한다. 무라카미는 고통을 견디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는 법을 배웠다. 그는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고통받는 것은 선택이다. 달리다가 '이렇게 아프다니 더는 못 참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픔 자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더 참을 수 있는지는 달리기하는 사람 자신에게 달렸다. 이게 마라톤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압축한다"고 썼다. 빅터 프랭클이 수십 년 전 지적했듯, 사람들은 필요한 고통을 견디는 능력에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201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연구에 따르면, 운동선수와 비운동선수의 통증 역치(통증을 느끼는 지점)는 같지만, 선수들의 통증 내성(견딜 수 있는 통증량)이 더 높다. 이 내성은 훈련 과정에서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극복하며(통증을 경험하고 한계를 마주하고 뚫어내며) 발달한다. 무라카미는 경주에서 타인을 이기는 것보다 스스로와 경쟁하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고백한다. 니체의 유명한 말처럼, "왜(why)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법(how)도 견딜 수 있다." 깊은 열망에 사로잡히면 좌절을 견디며 결단력 있게 나아간다.

사람들은 어떻게 가장 혹독한 도전을 견디고 가장 유혹적인 유혹을 극복할까. 보통 영웅적 의지력이나 자제력으로는 아니다(그게 충분히 강했다면 다이어트는 성공했을 것이고 새해 결심은 이뤄졌을 것이다). 우리는 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을 때만 고통과 어려움을 견딜 수 있다. '아기를 사랑하니 담배를 끊겠다', '나라를 사랑하니 해병대 훈련소를 견디겠다' 같은 것 말이다.

자제력은 종종 더 큰 욕망으로 작은 욕망을 정복하는 기술이다. 아이, 나라, 신을 사랑하는 거대한 가능성에 헌신하면, 작은 유혹이나 선호(고통을 무조건 피하려는 것)는 덜 중요해진다. 무라카미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재능, 집중력, 인내력이라 주장한다. 소설이나 교향곡 작곡처럼 영감이 중요한 분야에선 이 순서가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명에선 인내력 또는 스태미너가 가장 중요하다.

레이 크록은 수십 년간 종이컵 판매, 부동산, 밀크셰이크 기계 판매, 피아노 연주 등 수많은 사업을 시도했다. 마침내 50대에 맥도날드라는 식당을 듣고 전국을 반쯤 가로질러 찾아갔으며, 그 성장을 집요하게 지켜보며 이끌었다. 그는 이 격언으로 자신의 결의를 표현했다. "세상 그 무엇도 끈기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재능은 못한다. 재능 있으면서 실패한 사람은 흔하다. 천재는 못한다. 보상받지 못한 천재는 속담 수준이다. 교육은 못한다. 세상은 교육받은 실패자로 가득하다. 오직 끈기와 결의만이 전능하다." 과장이지만 크게 틀리지 않았다.

최고의 동료는 완전히 결심한 탐구자의 태도를 지닌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 말겠다.' 이런 스태미나는 거의 비합리적으로 지속되는 열망에서만 흘러나온다. 무라카미 회고록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50대에도 마라톤을 계속하는 부분이다. 더 열심히 훈련해도 기록은 오르지 않고, 다리 근육은 쉽게 쥐가 나며, 경주는 더 고통스럽고 종종 실망스럽다. 그럼에도 그는 "달리기가 인생에 있어 매우 기쁘다", "죽을 때까지 하길 바란다"고 고집한다. 재능 있는 신인이 등장할 때 우리는 눈이 부시지만, 노련한 베테랑이 계속 경기에 남는 모습에도 깊이 감동한다. 무라카미는 지금 76세다. 여전히 매일 달리고 있을 것이다.


◇고통을 선택하는 이유

이 긴 여정을 함께한 건 사람들이 왜 자발적 고통을 선택하는지 이해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도 있다. 이런 고된 삶이 최선의 삶이라는 확신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미국인 절반처럼 나도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Adolescence)'을 보고 있다. 이 작품은 소셜미디어 시대 청소년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가차 없이 보여준다. '죽지 않으면 강해진다'는 낭만적 생각을 깨준다. 때론 트라우마가 인생을 돌이킬 수 없이 나쁘게 만들 뿐이다.

아이들에게 다가가 부담을 덜어주고 스트레스를 줄이며 모든 걸 쉽게 만들어주고 싶어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움을 피하기보다 맞설 때 삶이 더 순조롭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때, 삶이 한 방향으로 중요한 목표를 향해 집중될 때 더 평온해진다. 인간은 여정을 위해 태어났다. 여정 속에선 더 큰 스트레스가 더 큰 만족감으로 이어진다(최고 수준에 오르기 전까지는).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노력은 삶에 의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다. 노력은 무언가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고 썼다.

이 모든 수고는 마라톤이나 신문 기사, 잘 정리된 식료품점 선반 자체가 아니다. 점차 자신을 원하는 강인한 인간으로 성형하는 과정이다. 도전으로 자신을 확장하고, 훈련으로 단련하며, 이해력과 능력과 품위를 키우기 위함이다. 최고의 성취는 그 여정의 열정을 통해 당신이 되는 사람이다. 무라카미는 회고록 끝에 묘비에 '작가이자 러너'라 쓰여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적어도 그는 걸어간 적 없다"고 덧붙이고 싶어한다.

물론, 얕은 수준에선 쾌락과 고통의 축에서 삶을 산다. 하지만 더 깊은 수준에선 강렬함과 표류 사이의 축에서 산다. 진화나 신은 우리에게 탐험하고, 건설하고, 개선하려는 원초적 충동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열정이 진화가 요구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을 때, 어떤 실용적 논리 너머의 무언가에 헌신할 때 삶은 최고조에 이른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어한다. 소명과, 프로젝트와, 사람과.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견디기 정말 끔찍한 상태다. 평안을 최고로 여길 권리를 얻은 사람들(물러나서 이룬 번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주 없진 않겠다. 하지만 나는 은퇴자들을 포함해서 그런 사람을 거의 만난 적 없다. 몇 달 전, 100세 노인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의 이야기는 읽는 책, 참석하는 강연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삶의 많은 욕망(지위, 성)은 사라졌겠지만, 그는 여전히 배우고 이해를 깊게 하고 싶어했다.


우리는 삶을 드라마로 보길 원한다. 드라마의 본질은 거대한 장애물에 맞서려는 한 사람의 맹렬한 열망과, 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다. 드라마나 삶 속 인물을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고통을 견디려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의대, 성직자, 경찰 업무의 고통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투쟁을 통해 우리는 행동하고, 기술을 연마한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는 티라노사우루스에게 염소를 먹이로 주는 장면이 있다. 샘 닐이 한 말이 영화 전체를 움직인다. "티렉스는 먹이를 받아먹길 원하지 않아. 사냥하고 싶어하는 거야."

누군가 내 삶에서 글쓰기의 고통을 빼앗는다면 싫을 것이다. 대부분의 마라토너들도 마지막 몇 마일의 고통을 빼앗긴다면 싫어할 것이다. 우리 친구 도파민 씨는 항상 앞서 나가며 긍정적 보상을 예상하고, 다음 산등성이 너머 더 나은 것이 있음을 감지한다. 인간의 불안정함엔 축복이 있다.

내가 묘사한 이런 매혹에 대해 사람들은 과장되게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조각가 헨리 무어는 과장했지만 핵심을 포착했다. "인생의 비밀은 과업을 가지는 것이다. 평생을 바칠 무언가, 하루 24시간 모든 것을 쏟아부을 무언가.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 당신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브룩스는 정치, 사회, 문화 트렌드에 대해 칼럼을 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