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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자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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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Oct 05. 2015

혀 짧은 소리

유자 꿍꼬또? 산책 꿍꼬또?

오글거리는 건 정말 질색이다. 길거리에서 커플들의 애정 넘치는 대화라도 듣게 되면 ‘대체 왜 멀쩡한 성인들이 혀 짧은 소리로 대화를 하는 거냐’고 생각하며 최대한 빠른 걸음을 걷곤 했다. 꼬맹이들의 혀 짧은 소리는 귀엽다고들 하지만, 그리고 불가피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 꿍꼬또, 기싱 꿍꼬또”라는 유행어 앞에서는 정말, 정말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당연히 나는 그런 말투를 잘 쓰지 않는다. 애교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라 더 그렇겠지만, 혀 짧은 소리와 가까워지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유자 앞에선 예외다. 전혀 의도한 바가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유자 앞에선 혀 짧은 소리를 내고 있다. 사료를 부어주며 “유자 배고팠쪄?”라고 묻거나, 나갔다 돌아왔을 때 반기는 유자에게 “큰누나 많이 보고 싶었쪄?”라고 말하는 식이다. 심지어 그렇게 싫어하던 ‘꿍꼬또’ 마저 내 입으로 말해버렸다. 낮잠을 자며 네 발을 휘젓다 깨어난 유자를 보고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어이구, 유자 산책하는 꿍꼬또?”라고 말을 걸었다. 아무리 유자 팔불출을 자처한다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는지 요새도 가끔씩 흠칫 놀란다.      

어이구, 풀 뜯어 먹고 싶었쪄?

그나마 엄마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도 자주 갓난아이한테 말하듯이 유자에게 말을 건다. 그랬쪄요 저랬쪄요는 기본이다. 아기들한테 하듯이 까꿍 놀이를 하고 기차 놀이를 한다. 유자를 품에 안고 놀아주는 엄마를 보면 20년 전 남동생을 어르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가끔 유자를 남동생 이름으로 잘못 부를 때가 있는 걸 보면 엄마에게는 이미 귀여운 막내 아들인가 보다. 유자의 귀여움 앞에서 내 혀만  무장해제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어이구, 용감하게 점프했쪄?

이렇게 또 한 가지가 무너졌다. 혀 짧은 소리를 싫어하는 나의 마음은 아주 견고한 성벽 같았는데, 언제 무너졌는지도 모르게 무너져 있다. 처음에는 참 당황스러웠다. 이름도 다양한 마음의 벽들은 전부 나름의 이유를 갖고 쌓아 올려진 것들이다.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대체 몇 개의 벽이 무너졌는지 셀 수도 없다. 그렇지만 무너져 내린 벽의 잔해들을 보면, ‘이게  뭐라고’라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혀 짧은 소리를 싫어하는 마음의 벽’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별로 큰 차이도 없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속의 유자가 벽을 부수고 돌아다닐 때 ‘또 그랬쪄? 잘했쪄.’라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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