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침대에서 새끼 도마뱀을 봤고, 다음 주면 태국에서 두 번째 월세를 내야 한다. 계절의 변화보다는 월세 이체 영수증 개수를 보는 것이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더 쉬운 방법이지만, 조금은 시원해진 아침저녁 공기가 이곳에서의 계절도 건기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거의 매일 천둥과 번개, 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지만 비가 그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창밖에서 풀벌레가 울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산다.
수업은 재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영미권에서 유학한 지인들에게서 듣기로는 쏟아지는 리딩과 에세이, 원어민들과의 토론으로 아주 피폐한 삶을 살았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저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언젠가 과제에 눌려 지금 한 이 말을 취소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물론 리딩은 많고 학기말 페이퍼 과제도 과목별로 있고 발표도 있지만,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그러니까 내가 ‘다수’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평안함 같은 것이 있다. 내 존재가 눈에 띄지 않는 것, 시선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크게 좌우된다는 걸 느꼈다. 내가 아시아가 편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구나. 물론 영어를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것이 유학의 중요한 목표인 사람에겐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다양한 영어 악센트를 듣는 건 언제나 즐겁지만 그것에 익숙해지는 건 또 다른 일이다. 3년 전부터 라오스 사무소와 일하며 이 지역 영어 악센트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학교 밖 사람들이 하는 영어는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다. 또 하나, 친구들이 쓰는 브로큰 잉글리시를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랄 수 있겠다.
생활은 꽤 단조롭지만 그 단순함이 8년의 직장생활 동안 쌓인 몸과 마음의 노폐물들을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 수업을 듣고,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다음 수업 자료들을 읽고, 체육관에서 PT를 받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유튜브를 보고, 다시 자료를 좀 더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생활. 나는 이 성실한 단순함이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나중에 내게 남는 건 학위장뿐만 아니라 이 시간 동안 만든 내 몸과 마음과 생각의 근육 이리라는 것도.
무엇보다 이곳 생활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는 햇볕이다. 아주 뜨겁고 건조한 한낮의 해. 어떤 우울과 괴로움도 바싹 말려 없애버릴 것 같은 강렬한 열대나라의 햇살. 나무가 가득한 캠퍼스 안에서 이 햇볕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 어떤 눅눅한 감정의 곰팡이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빨랫대에 걸린 이불처럼 보송하게 살균 소독된다. 팔과 두피가 자꾸 타는 게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오늘 밤에도 잠을 설칠 만큼 시끄럽게 스콜이 내리겠지만 아침은 고요할 것이고, 나는 또 나의 단순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