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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Jan 24. 2023

그냥 일기

12월엔 학교에서 캄보디아로 스터디 투어를 다녀왔고 연이어 한국에 갔다가 지난주에 돌아왔다. 캄보디아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왔는데, 역시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하면 딴짓을 하고 싶다. 학기 중엔 써야 하는 것(=텀페이퍼)만 썼기 때문에 이럴 때라도 내 맘대로 앞 뒤가 안 맞고 논리가 1도 없는 일기를 쓰고 싶어 진다. 원래 브런치는 좀 정돈된 글을 쓰는 곳 아닌가 싶은데 사실 나는 여기를 네이버 블로그처럼 쓰고있는 것 같다...


한 학기가, 아니 1년이 어떻게 지나갔나 싶다. 작년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선택과 결정이 잇따랐다. 딱 1년 전 이맘때엔 프로젝트 보고 기한을 맞추느라 잠을 줄여가며 일하고 있었다. 이미 2021년 12월 말부터 대학원에 갈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긴 했지만, 설 연휴 중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여덟 시에 침대에 누운 그날이 한 번 더 마음을 굳게 먹은 계기가 되었다. 3월에 라오스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2월도 한숨 돌릴 새 없이 바빴는데, 그 와중에 출퇴근 길에는 아이엘츠 듣기 문제 파일을 듣고 퇴근 후에는 입학원서를 준비하고 주말엔 아이엘츠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었다(뭐 4회 분량의 모의고사집 한 권을 다 못 끝내고 시험장으로 가긴 했지만...). 3월은 라오스에서 보냈다. 1주일 간의 격리도, 12시간의 산길 이동도 그저 행복했던 기억뿐이다. 복을 빌어주는 바씨 의례(basi ceremony)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내 출장 중에 현지팀 절반이 코로나에 걸렸는데 나는 안 걸린 것이 생각할수록 웃기고 신통방통하다. 매일 다 같이 점심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말이여. 라오스 출장 이야기는 어디에도 길게 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때의 내 감정이 생생하다. 그때 나는 많이 울었다. 퇴사 결심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혼자 매순간 센치해졌지 뭐... 내가 마음을 쏟은 것들,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공을 들인 일, 그리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었다. 라오스 팀의 환대는 내게 과분했다. 퇴사 전 내 마지막을 라오스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단 생각을 했다. 돌아와서는 출장 정산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남은 일들을 마무리하고, 3차에 걸쳐 인수인계를 하고, 5월 초에 마지막 출근을 했다. 5월은 진이 빠진 채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지냈다. 그 좋은 날씨에 밖에 돌아다닐 기운이 없었다. 6월부터는 작은 연구프로젝트를 간단히(?)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서 출국 준비를 했다. 집을 내놓고, 당근 거래를 부지런히 했다. 송별회를 빙자해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7월, 80킬로그램의 수하물과 함께 방콕에 도착했다. 집을 구하고, 다시 짐을 풀고, 8월에 학기가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다시 폭주기관차에 실려 정신없는 학기를 보냈다. 한 학기에 2학점짜리 여섯 과목 듣는 대학원... 듣도 보도 못했고요... 페이퍼 여섯 개 쓰고 나서 정신 차려보니 12월이었다. 방학이라고 좋아했는데 또 캄보디아 트립 가야 된다고 해서 끌려(?) 갔다가 돌아와서 답사 보고서 또 쓰고, 학기는 끝났지만 제출일은 방학 마지막인 텀페이퍼 또 쓰고, 한국에 갔는데 또 페이퍼 쓰고, 하다 보니 새해가 밝았고 2학기가 시작했다.


퇴사 시점인 5월 정도엔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살이 빠져서 아주 종이인형 같은 상태였는데, 이번에 한국에 가서 보니 3-4킬로가 쪄 있었다. 태국에서 PT도 받았는데... 근육이라고 믿고 싶지만 아무래도 태국음식이 워낙 달기도 하고 퇴사 후 위염 식도염으로부터 탈출하면서 식욕이 왕성해진 탓인 것 같다. 위염 식도염이 없으니 정말 삶의 질이 너무 높아졌고 아무거나 먹을 수 있어서 나 너무 행복해...


서울에 있는 동안은 애인 집에서 머물렀는데, 밤늦도록 과제를 하는 내 옆에서 책을 읽거나 책장정리를 하던 그 사람의 모습을 눈에 꼭꼭 담아두고 싶었다. 함께 먹은 많은(정말 양이 많은) 밥, 그리고 커피도 소중했다. 불안은 열에 취약하다는 걸 알았다. 불쑥 찾아오던 불안은 사람의 온기로 녹아 사라졌다.


다시 태국에 돌아왔을 때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긴장이 탁 풀리면서 찾아오는 특유의 안도감이 있는데, 수완나품 공항에서도 그보단 덜하지만 익숙함과 안전함을 느꼈다. 무엇보다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에서 꿀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제 이곳이 내 집이구나 싶었다. 서울이 유독 추웠기 때문일까? 요즘 태국 날씨가 참 좋기도 좋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고 한낮에도 그늘에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아직은 학기 초라 과제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이라 마음도 한결 여유롭다. 지난주엔 천천히 학교 안을 산책했는데, 이 공원 같은 초록초록한 캠퍼스가 내 영혼(!!! ㅋㅋㅋ)을 충만하게 채워주었다. 무성한 나무와 물소리, 새소리. 다른 건 몰라도 캠퍼스 하나만 보면 여길 오길 잘했다 싶은 만족감이 10000000%다. 초록 너무 좋다... 알록달록 꽃 색깔들. 거대한 활엽수들. 그런 게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준다(방콕 시내 한복판에 있는 다른 학교들도 다들 이렇게 멋진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 줄은 잘 모르겠다만).


지난 주말은 밖에 안 나가고 집콕했는데, 그것도 또 얼마나 좋게여... 집에 채광이 얼마나 좋고 또 우리 집 뷰가 막힌 거 하나 없는 탁 트인 풍경이기 때문에 집순이인 나에게는 그만한 충전이 없다. 10년의 자취 인생 중에서 가장 넓고 채광이 좋은 집이기도 하다 ㅎㅎㅎ


여기까지 쓰고 나니 친구가 김연수 새 소설을 꼭 읽어보라고 한다. 읽어야 할 논문이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다른 게 다 너무 재밌어 보이는데 소설은 또 얼마나 재밌을까... e북을 사러 가보겠다... 이렇게 정리 안된 결론으로도 글을 끝낼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이런 일기가 나에게 얼마나 큰 해방감을 주는지!!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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