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위밍 Apr 16. 2024

해피 송크란

구정부터 새해라고요? 4월에 또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어요

거대한 인파가 물총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유명한 태국의 물축제 '송크란'은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기념하는 새해 행사다. 우리에게 음력설(Lunar New Year)인 구정이 있다면, 태국,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에서는 4월을 전통 설 명절로 여긴다. 이 시기는 매년 태양이 황도 12궁 중 첫 번째 별자리(제1궁)인 양자리로 넘어가는 때로 열두 달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쌀 수확이 끝난 4월 중순에 열리며, 물을 붓는 행위를 통해 정화와 경건함, 축복을 빈다. 불교 달력을 따른다는 말도 있고, 고대 인도의 힌두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는데, 힌두와 불교문화가 융합되면서 발전한 의식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 '송크란'이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하여 '이동', '변화', '진입'을 뜻하므로 역시 새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4월 물 축제는 고대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당시 최고로 번성했던 크메르 제국 영토는 지금의 태국과 라오스, 미얀마에 해당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이 나라들에서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라오스에서는 분 삐마이(Pi Mai), 미얀마에서는 띤쟌(Thingyan), 캄보디아에서는 쫄츠남(Chol Chnam Thmey)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시기에 열린다. 다만 태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데다 관광대국인 탓에 송크란이 물축제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흥미롭게도 인접한 국가인 베트남은 다른 네 국가만큼 불교가 다수 종교가 아닌 데다가 중국과 동일한 음력 달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물축제 전통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 태국의 송크란은 통상 3일 연휴인 것에 이틀을 더해 4월 12일 금요일부터 4월 16일 화요일까지 5일간이나 이어진다. 게다가 4월 8일(월)이 짜끄리 왕조의 설립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Chakri Day(4월 6일)의 대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직장인들은 화, 수, 목 3일 휴가를 쓴다면 무려 11일을 쉴 수 있다. 태국 정부는 연휴 5일뿐 아니라 4월 한 달 내내 송크란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태국의 '소프트 파워'를 세계에 알리는 역대 최대규모 축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작년인 2023년 12월 6일 송크란 물축제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4년을 공들여 등재된 만큼 올해 행사는 정부 차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기념하겠다는 야심이 느껴졌다.


작년 송크란 때에는 친구들과 깐차나부리로 여행을 갔는데, 올해는 방콕에서 혼자 보냈다. 우선 연휴 동안에는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고 배달비도 치솟기 때문에 냉장고를 채워뒀다. 같은 과 미얀마 친구들은 타국에서 열리는 전통 명절을 제대로 즐기러 카오산로드 물총싸움에 참전(?)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작년 칸차나부리에서 물총, 물 양동이, 물 호스 등등 거리에서 물세례를 흠뻑 경험했기 때문에 올해는 집콕이나 할까... 하다가 방콕 왕궁 광장(Sanam Luang, 사남 루앙)에서 5일간 정부 주최의 공식 행사가 열린다고 해서 호기심에 2일 차 행사에 다녀와봤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77개 도(Province) 대표단이 저마다 전통복장과 화려한 가마(?)를 타고 행진하는 대규모 퍼레이드였다.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복식과 특산물로 꾸민 가마 행렬이 장관이었다.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행렬 중심에 미스 태국 출신의 미녀들이 항상 있었다는 것과, 태어난 성별과는 다른 성의 전통 복장과 장신구를 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작년에 캠퍼스에서 열린 러이끄라통 행사에서도 여성이 추는 전통 춤 공연팀 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레이디보이들을 본 적이 있다. 학교 캠퍼스 안에서도 여학생 교복을 입은 MTF 트랜스 여성을 꽤 흔하게 볼 수 있는 걸 보면 이런 장면을 남다르게 보는 건 나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었습니다… 77개도 대표단과 동등하게 LGBTQ 퍼레이드(정부 보도자료에 LGBTQ 라고 표기했다)가 이어졌다. 태국이 자랑하는 영화와 드라마, 만화, 게임 등 서브컬처 행진도 있었는데, 퀴퍼도 아닌데 퀴어 퍼레이드를 하고, 코믹월드도 아닌데 코스어들이 코스프레 복장으로 정부 공식 행사에 참여한다는 게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사실, 태국이 성소수자에게 개방적인 분위기로 인식되는 것과는 별개로 성별정정이나 동성혼을 위한 법적 토대는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최근 동성혼을 허용하는 '결혼평등법'이 하원에서 통과되면서 동남아시아 최초 동성혼 합법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정부 주최 '설 축제'에서 퀴퍼라니.. 쿠데타를 12번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군부가 통치하고 왕권이 절대적인 이 보수적인 나라 태국이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까지 열려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놀랍고 신기하다.


광장 안에는 3개의 무대에서 각각 공연과 EDM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태국이 자랑하는 과일과 '소프트파워'를 보여줄 수 있는 무예타이 경기도 빠질 수 없었다. 여러 부스를 둘러보다 메인 무대로 가니 막 태국 교향악단의 오케스트라 공연이 끝난 뒤였다. 무대 정리를 하는 동안 송크란 주제가(?)가 흘러나왔는데, 갑자기 한국어가 들려서 너무 놀랐다. "송크란~ 송크란~ 행복이 넘쳐요" 알고 보니 무려 12개 언어로 송크란 노래를 번역해서 부른 것...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려는 태국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다음 차례는 태국 걸그룹 4EVE의 공연. 7명으로 이루어진 걸그룹이었는데, 일단 춤을 다 추면서 라이브를 너무 잘해서 놀라고, 밴드 세션까지 라이브로 연주하고 있는 것에 두 번 놀랐다. 한국이 자랑하는 케이팝 그룹들은 특별한 음악프로그램이나 단독콘서트가 아니고서는 밴드 구성으로 라이브 연주까지 하는 경우는 드문데, 여기서는 이게 기본인가...? 오늘 태국 친구에게 물어보니 여기서도 아주 흔한 일은 아니지만 종종 T-POP 그룹들도 라이브 세션으로 공연을 한다고 했다. 정부 공식행사에서는 라이브 밴드지! 역시 배우신 분들이다.


대형 메인무대 뒤로 빛나는 황금색 왕궁이 보였다. 일몰 후라 한결 시원해진 바람이 식은땀을 말려주었다. 여기저기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잔디밭이나 이벤트 부스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축제를 즐겼다. 이렇게 넓은 광장에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저마다 먹고 춤추고 뽐내고 물총싸움을 하며 놀 수 있다니. 지극히 T- 스러운 것으로 잔뜩 힘을 준 행사인 건 분명하지만 동시에 이런 축제를 왕궁 앞마당에서 주최하는 태국 왕실의 배포가 멋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국왕에게 감사하는 백성의 마음에 이입이 되었다. 현 국왕의 사생활 논란이 심각하지만 예.. 아무튼 임금님 감사합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도 택시도 타기 어려워서 전철역까지 한참을 걸어갔다. 어두운 밤에 더 빛나는 왕궁과 왓아룬 사원도 봤다. 1분기가 벌써 지나갔다고 아쉬워 하지 말아야지. 이제 송크란을 맞아 새해가 되었으니 또다시 새롭게 마음을 다잡을 기회가 생겼다. 후후. 올해도 건강하게. 해피 뉴 이어. 해피해피 송크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