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묻는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오늘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당신에게는 얼마나 많은 친구가 필요한가?”
누구나 그러할 때, 언제나 똑같을 때, 어디서나 마주할 때 우리는 그 대상(혹은 사건)에 무감각해지기 쉽다. 이 연재의 제목이기도 한 일상(日常) 또한 그렇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다반사(茶飯事)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니, 보통 있는 예사로운 일을 이를 것이다. 큰 변화가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 그것이 일상다반사다.
최근 일상사가 되어버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계정들을 잠그고 일주일 정도 휴지기를 갖은 적이 있었다. 원래는 한 달을 계획했다. 주변이 첨예하게 돌아가는데 혼자 모른척할 수 없어서 일주일 만에 동굴에서 빠져나왔지만, 일주일간의 SNS 다이어트는 여러 면에서 유용했다. 배운 것도 많고 깨달은 것도 있었다. 세상이 조용하면 이대로 굴 안에 안주해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애당초 쉬기로 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SNS의 근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상적 연결임에도,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서비스를 쉬는 이상한 전개였다. 사람들이 내던지는 말로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박제된 글이 가상의 친구들 사이에서 전파되는 속도는 입말의 속도보다 빨랐다. 그 속도에 맞춰 진위와 상관없는 감정 배설이 댓글의 형태로 꼬리를 문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는 맹목적인 바리새인 같았다. 이 이슈에 빠르게 올라타지 않으면 세상에서 낙오되는 것처럼 너도, 나도 숟가락을 얹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더 꿈틀대지 않으면, 곧바로 다음 제물을 찾아 떠나는 피에 굶주린 디지털 유목민이자 무리 안에서만 안정을 찾는 이들처럼 보였다.
팩트를 전달하는 뉴스나 사람들의 기쁜 소식이라면 엔도르핀을 더해 널리 퍼뜨려도 좋은 일이다. 어느 사인가 나도 포털이나 종이신문으로 뉴스를 접하는 대신, 페이스북에 의존하는 자신과 마주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했고, 나는 더 많이 노출되었다. 뉴스는 가치 선택적이다. 공유하는 사람들의 생각, 성향, 가치관에 따라 선별된다. 그래서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인간 사슬은 공공연하게 상대와 나의 궁합에 관하여 묻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4천 명을 넘어선 SNS 연결망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올 초부터였다. 물론 그전부터 이상징후를 알리는 신호가 끊임없이 전달됐지만, 애써 무시했었다. 몇 개의 사건이 터졌다. 나는 그 가운데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관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작은 사건이 거짓과 증오, 맹목적 공감과 문자의 폭력으로 증폭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과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대부분 약자 비하 사건)이 회자하는 패턴과 같지만, 더 빠르게 전개되었다. 나는 모두 보았다. 이를테면 우리 내면의 악마성 같은 거였다.
평소의 태도를 볼 때 절대 그럴 거로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이 거친 글을 남겼다. 그들의 확대 재생산된 악의적 감정들과 마주쳤다. 교류가 많았던 사람들의 글이 더 자주 드러나는 알고리즘 탓에 나는 안 봤으면 좋을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결국 나는 4천 명을 300명으로 줄였다. 언젠가 그들의 날카로운 칼이 내 등 깊숙이 들어올 것 같아서였다. 그것은 분명하게 그려지는 두려움이었다. 사람에 대해 공포를 느낀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득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왜 때문이죠?”, “그게… 그러니까…” 그들은 답을 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마 살인과 다른 게 뭡니까?” 나는 더 이상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면 막연한 공감은 위험한 것이다. SNS의 힘은 공감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생각 없는 공감이 사건의 진상을 살필 겨를도 없이 진실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순간이 온다. 평소 기계적 반응처럼 '좋아요'를 누르고, 하나 마나 한 얼굴도장 찍기용 댓글을 다는 것이 결국 실체 위에 덮개를 씌어 진실이 보이지 않게 만든다. SNS는 프로듀스X101이 아니다.
모든 상황에 염증을 느끼며 시작한 디지털 디톡스, SNS 다이어트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져 ‘대중 앞에 놓인 나’라는 허구로부터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게 했다. 날마다 반복되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예사로운 일로 다시 나를 이끌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 그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