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3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학교 앞에서 대학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남편 일로 해외에서 1년 넘게 지내다가 얼마 전 귀국했다. 여전히 학교 앞은 정답고 편안했다. 나는 이제 "화석이 됐네~"라며 너스레를 떨고 싶지도 않다. 그런 너스레는 너무 지겹고 재미도 없다. 이제 학교에 가면 화석이나 암모나이트 삼엽충 정도가 아니라, 지구 맨틀이 말랑말랑하던 시절에 태어난 기분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내가 입학했을 땐 학교의 주 거래 은행이 신한은행이 아니라 조흥은행이었다. 조흥은행, 왜 사라져서 나를 더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까...
내가 자주 다녔던 가게들은 진즉 사라졌다. 내가 좋아했던 900원짜리 야채호떡 안엔 숙주나물과 당면이 들어있었는데 없어진 지 아주아주 오래. 모두들 "빵굼터에서 만나~"라고 했던 빵굼터는 이미 내가 2학년이었을 때 사라졌다. 간장치킨이 맛있었던 모모치킨도, 버블티 팔던 뽀바도 없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건재한 건 스타벅스였다...! 게다가 그땐 학생들은 거의 아무도 안 가던, 효창공원 근처의 중국집 <신성각>이 갑자기 힙한 곳이 되어 있었다. 문 앞엔 '저녁 8시 23분에 문을 닫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그 엉뚱한 콘셉트와, 조미료 치지 않은 건강한 맛에 이끌려 몇 번 갔었던 곳이다. <동아냉면>도 늘 텅텅 비어있던 곳인데 방송을 탔는지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서인지 어느샌가 학교 앞 맛집으로 등극해 있었다.. 무엇이든 언제 터질지 모르니 신기하다.
모르는 가게들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쌀국숫집을 골라 점심을 먹었다. 꽤 맛있었다. 그리고 몇 년째 건재한 카페 <청파맨션>에서 수다를 떨었다.
나는 친구의 여행담을 좋아한다. 친구는 결혼한 다음에 남편과 둘이서 2년쯤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 여행담은 들어도 들어도 재밌다.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 가려다가 못 간 일화. 그 아름다운 소금 사막 말이다. 친구 부부는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쯤 우유니 사막으로 향하는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 비가 많이 내렸다. 진창길이 된 버스 기사는 결국 사막 근처까지 갔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로 선택. 하지만 양옆은 더 심한 진창이라 도무지 유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버스는 우유니 사막을 코앞에 두고 살금살금 1시간 반을 후진했다는 이야기.
그 밖에도 요르단에서 돌 맞은 얘기. (여자는 천대받는데 외국인은 더 싫어한다고.) 아르헨티나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폭스바겐 골(아토스와 비슷한 소형차라고)로 횡단하다가 진창에 빠져서 죽다 살아난 얘기. 페루의 남녀혼숙 게스트하우스에서 25금 장면을 목격한 얘기. 들어도 들어도 재밌는 얘기들. 오늘도 신나게 들었다.
나도 몇 년 전까지는 짐도 간단히 들고 다니며 겁 없이 여행했다. 특히 '숙소 예약 따위는 미리 하지 말고 도착해서 하자' 주의자였다. 심지어 인도를 혼자 여행할 때도 미리 숙소를 예약해놓지 않고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서 "방 주세요!"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다...) 그런데도 친구네 여행 얘기를 들으면 모험이 가득해서, '나는 비빌 게 못 되는군' 싶어 진다.
친구가 산리오 핀과 장갑, 파우치를 선물로 줬다. 오늘도 받기만 해 버렸네. 아기가 쓰기엔 아직 크니, 내가 먼저 써야겠다.
친구가 물었다.
"나중에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어?"
나는 답했다.
"지혜로워서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악기 한 가지 정도는 취미로 하더라도 전문가 수준까지 하면 좋겠어."
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쁜 판단으로 나쁜 결정을 내리면 결국 내게 안 좋을 뿐이었다. 내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좋다. 만약에 내게는 당장은 좋은 것 같은데, 남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안 하는 게 좋다.
또, 공부는 자기가 좋아서 한다면 좋겠다. 나는 어릴 적에 영어 공부를 진짜로 좋아했었다. 주변에 나만큼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외를 받아본 적도 없지만, 과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라고 쓰고 보니 나도 좀 꼰대 같이 느껴지네. 나의 어린시절과, 2030년에 학교에 다닐 우리 아이를 단순 비교해선 곤란하다. 우린 아주 다른 세상을 살아갈 테니까. 여하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남들에게 박수받겠다는 허영심으로 꽉 차, 명문대 타이틀을 얻으려고 24시간을 보내진 말라는 얘기다.
친구는 아이가 나중에 천체물리학을 공부하면 좋겠다고 했다. 친구도 여전히 천체물리학에, 밤하늘에, 별에 관심이 많았다.
꼭 마치 23살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