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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채 Apr 20. 2021

류이치 사카모토를
대변하는 3가지 장면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2017, 스티븐 쉬블)

첫 번째 장면: 침수되었던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

한 영화를 시작하는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어떤 공간이 보일지, 어떤 인물이 등장할지, 만약 인물이 등장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그 행동을 어떤 카메라 워크로 찍어낼지, 그 위에 어떤 음악을 덧씌울지, 그 선택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허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는 점에서 큰 제약을 얻게 된다. 다큐멘터리 필름은 ‘장면의 연출’이 아닌 ‘순간의 포착’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계획된 연출이 아닌 자연적 순간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다큐멘터리 필름의 숙명이다. 

하지만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자연적 순간의 포착’이라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낸다. 하나의 사례로, 류이치 사카모토가 쓰나미로 인해 침수되었던 피아노를 다시 조율하고 연주하는 신을 꼽을 수 있다. “마치 피아노의 송장을 연주하는 것 같네요.” 남자의 짧은 소회로 신은 마무리된다. 이 신에서 쓰나미를 견뎌낸 피아노와 암세포의 그늘에서 힘겹게 벗어난 남자, 그 둘은 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한 하나의 신을 꼽는다면, 망설임 없이 이 신을 뽑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어지는 신에서 남자는 원전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동일본 대지진의 이재민들을 위해 연주한다. 이렇게 불가항력의 사고를 이겨낸 한 남자는 공동체의 위로가 필요한 일본 사회 전체를 상징하며, 서서히 확장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장면: 비 오는 날, 양동이를 뒤집어쓴 남자

류이치 사카모토는 투병 생활을 거치며 일생 동안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생명의 비영원성’을 절실히 깨달은 남자는 ‘소리의 영원성’에 대해 더욱 깊이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아노는 울림이 지속되지 않거든요.
그냥 두면 소리가 약해지다가 없어져요.
아주 미세하게 울리고 있지만 점점 외부의 소음에 묻혀 사라져요.
지속되는, 사라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그런 소리를 내내 동경해 왔을 수도 있어요.
피아노 소리와는 성질이 반대인 거죠. 사라지지 않거든요.
일종의 영원성이랄까요.

-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중

작업실 한 켠에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물 간의 마찰음을 탐구하기도 하고, 양동이를 쓴 채 떨어지는 빗방울에 귀 기울이기도 한다. 인위적인 소리의 연출에 앞서 자연에서 발생하는 소리에 대한 포착. 류이치 사카모토의 다음 앨범은 다큐멘터리 필름과 같은 결을 띄지 않을까 추측하게 된다. 영혼이 가진 울림이 자연에서 비롯된 모든 소리에 묻혀 사라질 때까지, 이 남자는 언제든 숲으로 향할 것이다.



세 번째 장면: ‘영화 음악가’라는 직업인으로서의 남자

이 다큐멘터리 필름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을 직업 분류에 따라 구분하자면,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앞선 두 문단에서 주로 이야기했던 ‘앰비언트 음악가’로서의 류이치 사카모토. 두 번째로는 ‘영화 음악가’로서의 류이치 사카모토이다. 

이 다큐멘터리 필름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기조는 투병 생활을 바친 류이치 사카마토가 ‘앰비언트 음악가’로서 경험하는 근본적 변화를 다루고 있지만, 극의 중간중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영화 음악가’로서의 회고이다.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과 함께한 <마지막 황제>, <마지막 사랑>부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까지. 독립적인 음악가인 동시에 성공한 ‘영화 음악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 아닌 비결은 그의 육성으로 밝혀진다. 

영화 음악을 만드는 건 다른 관점으로 일하라는 주문 같은 겁니다.
음악 자체로 보면 자유가 없는 거죠. 
그런 불편함이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해요. 
전에 없던 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죠.

-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중

자유를 속박하는 제약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투병 생활을 마친 한 사람의 이야기 위에 ‘영화음악가’로서의 직업적 신조를 한 겹 덧씌움으로써, 보다 단단해진 ‘류이치 사카모토’를 영상 매체로 온전히 옮겨 담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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