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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채 Jun 22. 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건강한 마음가짐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2016, 고레에다 히로카즈)

 책의 제목부터 참 담담하고 심심하다. 하지만 이 제목만큼 '고레에다 히로카즈'스러운 제목이 있을까. 더군다나 책의 내용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은 그가 내놓은 결과물들이 어떤 것들로 시작됐고, 어떻게 진전됐는지 차분한 어조로 설명해나간다. 본문을 이루는 내용들이 직업적인 동시에 인간적이기도 해서, 완독하고 나면 사람으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느낌을 받기도 한다. 책을 덮고 난 후, 와닿았던 포인트 세 가지를 정리했다.


1. 다큐멘터리의 수법은 시대와 함께 갱신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써낸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 통해 얻은  가지먼저작은 경험에서도 배움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는 발전적인 태도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태도를 유지하게끔 만드는 건강한 마음가짐.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영화를 찍다>라는 책에서 "다큐멘터리란 피취재자의 '자기표현 욕구'를 찍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취재를 받는 자는 자신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하려 한다. 카메라는 그 연기하려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것을 찍는다. 즉 취재자의 이렇게 찍고 싶다는 욕구와 피취재자의 이렇게 찍히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다큐멘터리는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p.41)


오시마 나기사는 기록영화(다큐멘터리)를 충족시키는 창작자의 조건은 '대상에 대한 사랑과 깊은 관심'과 '그것을 지속시키는 시간'이라는 두 가지를 전제로 "취재를 통해 찍는 쪽에서 일어난 변혁까지 포함하여 작품화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p.56)


다큐멘터리의 수법은 시대와 함께 갱신된다. 시대와 함께 갱신되어야 하는 방법론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축해 나갈 것인가. 우리 창작자들은 지금 한번 스스로에게 따져 물을 시기가 되었습니다. (p.119)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상상(이미지)가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애정(오주마)이라고요. (p.253)


영화를, 세계를 이렇게 마주하는 방식을 앞으로 어디까지 성숙시켜 나갈 수 있을까? 또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고 싶습니다. (p.255)




2. 사회를 파악하는 시야의 넓이와 깊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스스로가 속한 집단인 '일본'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다. (옴진리교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피해자와 가해자로 철저히 양분화해 다루는 매스컴의 태도 등···) 그의 비판적 태도는 영향력을 가진 한 ‘어른’이 집단의 발전을 위해 길잡이를 자처해 나서는 듯 보이기도 한다.


제가 다큐멘터리에서 묘사하는 대상의 대부분은 공적인 부분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비판해도 그 비판이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시종일관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개인을 낳는 사회구조 자체를 파악하는 시야의 넓이와 깊이를 소중히 여깁니다. (p.44)


그때까지 저는 '범죄란 범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고름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이는 분명 우리와 관계가 있다'는 시점으로 범죄를 보도하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p.127)


살의나 전쟁 등 자신의 사고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해, 그 방송을 본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바르게 상상력을 가동시켜 가는 것. 분명 텔레비전에는 그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과 마주치는 장소를 확보하는 일이 최적적으로는 공동체 자체와 개인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공공재인 텔레비전이 해야 할 역할이다. <론자> 2005년 4월 호 (p.156)  



3. 죽음은 언제나 삶에 내재되어 있다.

의외의 포인트.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관점을 보다 명확히 할 수 있었다는 점. 서양의 문화권에서는 삶이 끝나고 나서야 죽음이 시작되는 것, 즉 삶과 죽음을 대칭적 구조로 바라본다. 허나 동양의 문화권(특히 일본)에서는 삶 속에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 강하다. 집 주변의 가족묘, 그리고 집 안의 납골함이 그 반증이 된다.

삶과 죽음이 갖는 관계성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삶과 죽음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뻗어 나가는 두 평행선 같다. 그리고 두 평행선은 어느 순간 한 지점에서 만나 하나로 합쳐진다. 그 순간이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만남으로 합쳐진 평행선은 단순히 죽음으로만 불리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 해서도 다른 의미로 삶을 지속하기 때문에. 남겨진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재정의 된다면, 죽어서도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다른 점은 서양인 그들에게는 삶이 끝난 다음에 죽음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즉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개념이지요. 하지만 동양에서는(특히 일본에서는) 삶과 죽음은 표리일체이며 서로 좀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반드시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언제나 삶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런 감각은 제 안에도 틀림없이 존재하고요.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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