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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파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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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Jul 20. 2020

파리일기_코로나도 나도 파리도 여름을 맞았다

4개월 만에 파리의 중심가를 걸었다

https://youtu.be/vQYVVy9TrtA


4개월 만에 파리의 중심가를 걸었다. 지난봄의 시작, 이동제한 실시를 며칠 앞둔 금요일의 오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두툼한 외투를 걸친 채 튈르리 정원의 벤치에 앉아 기분 좋은 봄햇살을 팔로 안아 담으려 할 때, 그때만 해도 이렇게나 오랫동안 우리가 이 길들을 걸을 수 없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활짝 목련 아래에 정원사분들이 정성껏 심으시던 꽃들은 사람의 관음도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기의 이유만으로 피었다가 지었을 터.


4개월 만에 찾은 센 강은 어느 날에 내린 비로 인해 물이 제법 불어나 있었고 어딘가에서 쓸려온 나뭇가지들이 강둑을 끊임없이 노크하고 있고 있었다. 강둑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둑 위에는 늘 보이던 조깅을 하는 사람도 나란히 앉은 커플들도 몰려다니는 여행객들도 없었다.


무척이나 불안해했던 지하철은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소문과는 달리 다들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역의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동양인은 나와 엠마 밖에 없었다. 샤틀레 역까지 가는 동안 우리의 객차 안에 타고 내리는 이들 중에서도 우리 외에 동양인은 없었다. 대중 속으로 숨을 수 없다는 부담감과 두려움이 컸지만 다행히 운이 좋은 이날만큼은 우리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는 내 앞에 앉은 흑인 꼬마 밖에 없었다.



이동제한이 해제되고 며칠 후,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월에서 6월로 연기가 되었던 가족의 행사가 더는 변경되지 않는다는 소식에 우리는 부랴부랴 한국행 티켓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티켓은 평소의 두배 정도나 가격이 뛰어 있었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직항 비행권은 너무나 비쌌기에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하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이동제한이 실시된 이후로는 집 근처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에 공항으로 가는 길, 공항에서 대기하는 일, 환승하는 일, 비행 동안의 식사와 화장실에 가는 일까지 사소한 모든 단계가 모두 걱정의 대상이었다. 집을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가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가라는 조언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간 생겨버린 많은 짐들의 정리와 여러 가지 행정처리를 할 자신도 의지도 없었기에 집을 새집처럼 청소해두고 큰 짐들은 수고스럽게 박스에 다시 담아두는 정도로 마음을 달래곤 여름옷을 담아 올 텅 빈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마스크에 위생장갑까지 두 겹으로 낀 채 조용한 택시에 몸을 싣고 공항으로 갔다. 샤를 드골 공항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이용객들보다 보안요원과 직원들의 수가 더 많았다. 기다리는 줄도 없이 마음먹은 그 순간 체크인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요구하는 자가격리 앱을 설치하는 문제로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잠시 머무른 스키폴 공항 또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상점들과 카페, 음식점들 앞에는 붉은 줄이 쳐져 있었다. 의자가 뒤집혀 있는 공항에 앉아 있는 일이 신기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피해 멀찍이 떨어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고 보니 평소에 우리가 서로 얼마나 근접해서 살아왔었는지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 닿고 스치는 감각이 이제는 이상하게끔 느껴졌다.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안고 살 수 있었을까.



한국에 도착하고는 2주간 격리생활을 했다. 한 달 정도 한국의 체류를 위해 2주를 격리해야 했다. 체온을 서너 번이나 재고 비슷한 서류도 두어 번 작성하고 어머니와 통화까지 하고 난 다음에야 출국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통제된 길을 따라 이제는 지내는 이가 아무도 없는 할머니 댁으로 갔다.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지 모르는 그 집에서 내가 살게 되었다. 할머니 집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안방의 달력은 8월에 부엌의 달력은 7월에 멈춰 있었다. 뚝뚝 물방울이 새는 수도 옆에는 20년이 된 하얀 쟁반이 있었다. 어느 신부님의 사제 수품을 기념하는 쟁반이었다. 20년이 된 쟁반 위에다 복숭아를 깎아 먹었다. 할머니가 가시는 날까지 손수 닦았던 타일에다 비누 거품을 묻혔고 30년 전 부녀회 행사를 기념하는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시킨 아귀찜을 먹다 보니 찬장 안으로 할머니보다 20년은 젊어 보이는 할아버지 영정 사진, 머리숱이 많은 엄마 사진 그리고 딱딱하게 젊은 내 사진이 보였다. 이동이 정지되어 있던 곳에서 이제는 시간이 정지된 곳으로 왔다. 관성이 두 번 끊긴 날들 속에서 나는 내가 뛰고 있었는지 걷고는 있었는지 반문했다.


코로나가 휩쓴 시절의 고국에는 내가 쉬이 갈 곳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도 편하게 얘기를 나누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거의 외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일을 하던 공간에서는 더 이상 나의 이름이 불리는 일이 없다. 남산에 간 김에 맘껏 부풀곤 했던 학교에 가보았다. 텅 빈 학교는 길고양이들 차지였다. 닫힌 유리문들을 밀어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붉은 줄을 넘어 나왔다. 시간과 이동의 관성뿐 아니라 이름의 관성 또한 끊겨 버렸다. 그토록 원했던 무중력의 상태. 난 그만 쓴웃음이 났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 며칠 전 이제는 스타가 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왠지 모를 부담감에 여러 번 거절했던 그의 전화를 이번만큼은 받아보았다. 경포대에 오니까 상석 생각이 난다며 16~17년 전에 경포대에서 함께 했던 일들을 얘기하던 친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젖어 있었다. 내 친구가 심사위원이 된 영화제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그 친구와는 차를 마시면서 7년 전 미국에서 함께 촬영했던 일들을 얘기했다. 매번 하는 얘기들에 또 같은 부분에서 합창처럼 웃었다. 멀어진 것은 내가 파리로 갔기 때문이 아니다. 그 해변과 그 도시들에서부터 우리는 조금씩 서로 다른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내가 힘들에게서 벗어나게 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샌가 고독으로 가 닿는 길 위에 선다. 믿고 싶지 않아서 무서워서 남들의 길을 환상으로 불러와 내 옆에 갖다 대는 것은 나의 나약함이었는지도.


다시 프랑스로 가는 것이 맞는지 생각이 많았다.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무엇을 찍고 무엇을 써야 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확신 따위는 없었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 보잘것없는 나의 상태에 뒷배경을 바꾸어 보고 싶은 마음만 컸던 것은 아니었는지. 어서 가고 싶던 지난가을과 달리 모든 것이 두려웠던 이번 여름의 파리행.


하지만 안내방송 속의 플리즈들이 실부플레로 바뀌자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느껴졌다. 익숙한 안내표지와 도로를 메운 그라피티. 꽉 막힌 공항 도로 끝에 집으로 향하는 도로를 발견하자 반가웠다. 현관에서 마주친 주민분과 봉쥬흐라고 인사를 나누고 번호키가 아닌 쇠열쇠를 두 번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이 여행으로 이 곳이 집으로 느껴지는 신기한 기분.


다행이었다. 붉게 날리는 LAVAGE 깃발. 내가 좋아하는 바르셀로나 팀의 져지를 입고 차들 사이를 어슬렁 거리는 세차장 주인아저씨. 무엇보다 파란 이곳의 하늘.



두 번째 체류를 준비하게 위해 싱크대를 보수할 실리콘을 사고 석회수에 건조해지는 피부를 진정시킬 크림도 잔뜩 샀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보니 마레지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사람들이 많아지니 마스크를 끼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졌다. 다행히 상점들 안에서는 마스크를 끼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상점의 입구마다 소독제들도 있었다. 가드가 있는 상점이 많은 파리에서는 실내에서의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이 잘 지켜지는 듯했다. 마레 지구의 예쁜 빈티지 가게들을 마다마다 들리면서 손은 더 건조해졌지만 기분도 그만큼 말라갔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찍고 무엇을 쓰는 일은 무엇보다 걷는 일에 달려 있다. 그러니 두려움을 조금은 덜고 다시 걷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무엇을 하려고 걷는 게 아니라 걷다 보니 말을 걸게 되는 거다. 걷는 곳보다 더 잘 말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나는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말겠다.


이 어려움이 이 번거로움이 사라지면 더 오래도록 더 꺾어 걸어보자. 우리는 퇴근 시간을 피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글, 이미지 레오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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